바위구멍(性穴)여행 (정읍두승산)
바위구멍(性穴)여행 (정읍두승산)
*날짜:2014년4월22일 화요일 맑음
*코스:황토현수련원/유선사/망화대(윷판형바위구멍)/두승산/말봉/끝봉/황토현수련원
*거리:약7km
*시간:약 3시간
*인원:돌까마귀,뫼꿈이,마동,느낌표!
*위치:전북 정읍시 고부면 입석리
정읍 두승산 말봉 정상에 만들어 논 모형이 말과되의 모형 같아 그 것이 있어 두승산이라 하였다, 생각 했었는데 또 다른 석두(石斗)와 석승(石升)이 있어 이를 두고 두승산이라 했다고 한다. 말과 되가 놓여있던 위치는 모르지만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는데 자료를 비교해 보지 않아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444m 의 높지 않는 산이지만 여느 산 못지않는 기개가 있고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어 보이며 가슴이 벅차도록 장하고 통쾌 한 맛을 선사 하는 산이다. 그것은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평야 지대에 홀로 우뚝 솟아 있어 그런것 같다.
두승산 가는 길은 정읍ic를 빠져나와 29번 도로를 따라 고부면 만수리를 지나 입석리에서 황토현 수련원으로 들어가면 산행시점에 도착한다. 고부에 들어서면 우리는 동학 농민운동과 녹두장군 전봉준을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고부 땅에 들어선 예의이며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산행시점에는 황토현 이라는 수련원이 있다. 황토현은 더욱이 전봉준 장군이 첫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곳이 아니던가.
고부면 입석리 황토현 수련원
이야기는 1892년4월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1893년 흉년이 들었음에도 농민들에게 터무니없는 죄명을 씌워 이 만여 냥이나 되는 재물을 빼앗고, 그래도 그 애비는 현감을 지냈던 모양이다. 애비 공덕비를 세운답시고 천 여 냥을 거두어 들였다. 백성을 다스린다는 명목 하에 과중한 세금을 부과 했으며,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목을 씌워 벌금을 부과하고 이에 대항하는 자은 여지없이 형벌을 가하였다. 특히, 구보(舊洑) 가 있었음에도 구보(舊洑) 밑에 신보(新洑)즉 만석보(萬石洑)를 만들어 물세란 명목으로 칠백 여 섬을 착복하였다.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 하러 온 전창혁을 때려죽이니 그가 곧 전봉준의 부친이였다. 그 뒤에도 진정서를 제출하는 자는 하옥과 고문 및 매질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 하였다. 백성의 봉사자로 민중의 지팡이를 자처하는 관리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보다 못한 농민들이 1894년 2월 동학접주 전봉준을 영도자로 추대하고 고부관아를 습격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고부 민란 1차 봉기다. 이것을 슬기롭게 수습하지 못한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으니 2차 3차 봉기, 청.일 전쟁 그리고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다.
1차 봉기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안핵사로 이용태를 내려 보내는데 사태 추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농민의 동향과 아픔을 성실히 살피지 못한 무능으로 인해 2차 봉기가 도화선이 된다. 첫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를 뿌리 뽑겠다고 포고를 한 것이다. 무고한 농민을 동학도로 몰았으며 동학도는 삼족을 멸할 수 있는 역적죄로 무차별 처벌 하였으니 말이다. 이런 강경책에 맞서 분연히 일어서니 이것이 2차 봉기다. 2차 봉기를 하며 전봉준은 총대장이 되고 김개남 손화중은 장령(將領)이 되어 봉기의 이유를 널리 알리는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한다.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 고통 받는 민중들과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하며 네 가지 군율을 정하여 진격 하였다.
첫째.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둘째.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라
셋째.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깨끗이 하라
넷째. 서울로 진격하여 세도가를 몰아내라
2차 봉기는 황토현 에서 첫 관군과의 전투가 벌어져 승리를 하게 된다. 이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은 마지막에는 전주성까지 점령 하게 된다. 그러나 정부의 무능으로 청·일의 군대가 개입하게 되자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동학농민군은 정부와 전주에서 화약을 맺고 철수한다.
그러다가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의 침략이 뚜렷해지자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침략에 항쟁하기 위하여 다시 일어나니 이것이 3차 봉기이다. 그러나 관군과 우세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전봉준 장군은 체포된다.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체포된 전봉준 장군에 대한 법정 심문기록과 심경은 과연 어떠했을까?
심문관: 왜 난을 일으켯으냐?
전봉준: 어찌 날 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는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이 부패한 너의 고관들이 아니냐?
심문관: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 없는 양민을 죽게 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봉준: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심문관: 최시형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는가?
전봉준: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충의란 본심(本心)에서 나온다.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냐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할 뿐이다. 참담함은 백성들도 만찬가지 여서 그 마음이 노래로 전하여 지는 것이 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하절인줄 알았더니
엄동설한 되었구나
왜적의 침략을 막고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녹두 전봉준 장군 및 동학농민들을 나라에서는 역적으로 몰아 죽이지만 그 나라라는 조선은 그 이후 왜적 일본에 의해 망하게 된다. 참으로 애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두승산 등산로 안내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황토현 수련원에서 두승산 산행을 시작한다. 황토현 수련원을 뒤로하고 두승산 안내판에서 유선사로 올라간다. 선운사의 말사인 유선사는 신선들이 놀다 간 곳에 절을 지어 유선사라고 하였다고한다. 유선사에 도착 하면 세 번 놀라게 된다. 상당히 높은 곳에 지어졌음에 놀라고, 유선사의 연륜을 말없이 전해주는 고목의 느티나무에 놀라고, 눈앞으로 거칠 것 없이 펼쳐지는 조망에 놀라는 곳이다. 호랑이 모형이 눈에 거슬리는 유선사를 뒤로하고 망화대로 향한다.
두승산 유선사
유선사에서 5분정도 두승산을 향해 오르다 보면 전면에 큰 바위가 나타나데 이곳이 망화대이다. 정면 중앙에 망화대라 각자되어있고 좌측에 명문 우측 에는 명문과 고누판형과 윷판형 바위구멍이 만들어져 있다. 김일권 선생의 논문을 인용하면 먼저 그림배치도, 도형암각화, 삼인결의문, 망화대, 5언절구 순으로 해석을 해 놓았다.
두승산 망화대 전경
두승산 망화대 그림 배치도
그림출처: 김일권,"한국인의 윷놀이판 바위그림에 투영된 천체우주론적 관점 고찰: 井邑 斗升山 望華臺의 바위그림 자료 소개를 덧붙여",「한국암각화연구 제5집」,한국암각화학회,2004,94p
두승산 망화대 그림배치도
가. 망화대 도형 암각화
나. 삼인결의 각자 명문
다. 망화대 표지석
라. 망화대 5언절구 명문
망화대 도형 암각화
망화대 도형 암각화
그림출처: 김일권,"한국인의 윷놀이판 바위그림에 투영된 천체우주론적 관점 고찰: 井邑 斗升山 望華臺의 바위그림 자료 소개를 덧붙여",「한국암각화연구 제5집」,한국암각화학회,2004,66p
1. 최상층 삼점도
2. 우상측 하도(河圖)
3. 우좌측 낙서(洛書)
4. 하우측 윷판도
5. 하좌측 십오수상도
6. 최우측 십오수도
나.망화대 우측 삼인 결의문 명문
우리 세 사람이 결의를 하니, 세세토록 잊지 말기를 확약하다.
정헌 윤대홍 칠곡인
휴남 강환선 진주인
둔암 전운구 정선인
병술년(1946)8월 모일
은남 강규선 58세에 졸하다 입석리
다.망화대 표지석
표지석으로 세원진 망화대 글씨는 이곳의 바위뿌리를 일컫기도 하면서 왼편의 명문의 표제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씨는 좌측의 명문에 근거하여 1936년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土)위에 사(舍)를 올린 대자가 이채롭다.
라.망화대 5언절구 명문
신주의 시대가 이제 끝났으니
봄가을로 의탁할 바가 없도다
일제 아래 암담하니
홀로 망화대에 오르다.
복주 정우달이 짖고
간재 전우가 삼가 이어 아울러 쓰다.
뭇 세상이여 일월이 어찌 혼미 하겠는가
복주의 흔적이 여기에 있도다.
팔방에 암울한 바람이 부니
망화대야 말로 진중한 보배로다.
병자년(1936)4월 모일 불초자식 해근과 해표
이곳에서 신주는 중국을 일컫는 별칭임
특히 명문 위에 3개의 연꽃을 새겨놓은 모습이 이채롭다.
두승산 산정의 망화대 바위그림으로 새겨진 윷판도는 주변에 동양적 우주론을 대표하기도 하는 상수역학적 하도와 낙서도상을 동시에 동일한 판에 함께 구조화지어 놓았다. 여러 측면으로 보아 비록 이 바위그림의 제작시기가 최소한 조선조내지 구한말의 시대적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지만, 고대부터 내려오던 윷판도의 우주론적 의미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확장된 면모를 보이고 있기에 주목되는 자료다. 이 역시 윷판그림의 바위문화를 더욱 살아있고 풍부하게 하는 중요한 우리의 문화 자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내용은 김일권 선생의 한국암각화연구 제5집 57p ~ 105p 권호별 논문보기 한국인의 윷놀이판 바위그림에 투영된 천체우주론적 관점 고찰(정읍 두승산 망화대 바위그림 자료 소개를 덧붙여) 의 논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
망화대을 뒤로 하고 두승산 정상을 지나 다음 봉에 오르면 말봉에 이른다. 말봉 정상에는 원모양 위에 네모난 모형을 자연바위에 만들어 놓았고 우측으로는 망선대, 좌측으로는 수두목승 이란 각자가 있다. 원은 석두(石斗) 네모는 석승(石升) 즉 말과 되모양을 만들어 논 분위기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제단을 만들어 논 것 같다고 한다.
두승산 말봉 정상
두승산 말봉 정상
두승산 말봉 망선대
이 수두목승이란 글자는 1920년대 정읍의 유지 동초 김석곤이란 사람이 새겼다고 하는데 그 뜻은 물은 말과 같이 큰 그릇으로 헤아려야 하고 곡식 등은 작은되로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를 해 놓았다. 비슷한 내용으로 같이 동행한 답사 일행 중 돌까마귀, 뫼꿈이님은 물의 양을 재보고 나무의 숫자를 헤아려 본다는 뜻으로 봄에는 이곳에서 풍년의 기원을 제사 지내고 가을에는 이곳에서 들판을 보며 세금의 양을 측정하는 뜻으로 해석을 하였다.
두승산 말봉 수두목승
그런데 글자는 최근에 새긴 것 같으며 기계로 판 것 같다고 하였다. 글자의 전문가인 두 사람의 주장이다. 두승산은 이곳 말봉이 최고의 조망지로 사방이 눈앞에 펼쳐진다. 망선대는 일제말기 1943년에 친구 3명이 함께 올라 새긴 각자로 축천대 각자 밑에 해방 후인 1953년에 3명을 포함한 7명의 동지이름이 새겨져 있다. 유선사란 절과 망선대의 글자처럼 이곳 두승산은 눈앞에 펼쳐지는 풍광이 너무 좋아 신선이 된 기분이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 하고 정자가 있는 끝봉으로 향한다. 끝봉 말 대로 산줄기 끝자락 봉우리에 정자를 세워 놓았는데 멀리서 정자를 바라보는 운치나 정자 안에서 사방을 바라보는 경치가 그만이다. 정자안은 얼마나 깨끗하게 치워 놓았는지 등산화 끈을 풀지 안고는 들어 갈 수 가 없어 끈을 푼 문화유산울림 안여종 대표만이 들어 갈 수 있었다. 이곳 끝봉에서 우리가 지나온 능선 옆구리 산길과 계곡을 따라 되돌아가면 출발점 황토현 수련원에 도착하고 모든 산행을 마치게 된다.
두승산 끝봉
두승산 끝봉
정리를 해보면 지나 오면서 언급을 안 했지만 이곳 두승산은 육산(肉山)으로 부드럽기가 한이 없는 산이다. 우리나라의 멋진 조선 소나무로 감싸 아진 아름다운 산이다. 그러기에 발끝에 닿는 감촉은 맨발로 푹신한 융단을 걷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범상치 않는 분위기가 풍겨 나는 산이다. 그 것은 적당한 바위가 능선을 따라 펼쳐지고 특히 조망 좋은 말봉에서 그 위세가 절정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바위구멍 답사회원들에게는 망화대의 오묘한 바위그림이 한편의 논문이 작성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에 감동 받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망화대나 망선대에 새겨진 개인 이름들을 보면서 매번 느끼는 감정을 유흥준의 나의 문유산답사기 2권에 나오는 처사 남명 조식편의 글을 인용하며 마친다.
남명 선생은 퇴계 이황과 동갑으로 당대 도학의 쌍벽이었다. 옛 말에 이르기를 왕비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보다도 문묘 배향자를 낳은 집안이 낫고, 문묘 배향자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처사를 배출한 집안이 낫다고 했다. 퇴계는 평생에 처사가 되기를 원하여 죽을 때 영정에 벼슬이름을 적지 말고 처사라고 써주기를 희망했다지만 그는 처사 지망생이었지 처사는 아니었다. 오직 남명만이 진짜 처사였다. 그런 남명이 남긴 말이다.
"대장부의 이름은 사관이 책에 기록해 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지 돌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날아다니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