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금석문 산행

동해 무릉계곡(武陵溪谷) 금석문(金石文)을 찾아서

느낌표!! 2012. 11. 28. 17:20

 

동해 무릉계곡(武陵溪谷) 금석문(金石文)을 찾아서

 

답사일자:2012년11월27일 화요일 맑음

답사코스:관음암-신선바위-하늘문-신선봉-쌍폭포-용추폭포-두타산성-관음폭포-학소대-삼화사-관리사무소-무릉반석-호암소

 

얼마나 아름다운 계곡 이면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신선이 노닐던 이 세상의 별천지라, 물과 돌이 부둥켜서 잉태한 오묘한 대자연에서 잠시 세속의 탐욕을 버리니, 수행의 길이 열리네 라고 무릉반석의 금석문이 전할까 그 궁금중을 풀러 동해의 무릉계곡으로 떠난다.

 

대자연 산악회의 백두대간 두타,청옥 무박산행을 따라 나선다. 모든 회원은 새벽 의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 치는 두타산 출발점에 내리고 나는 무릉계곡 해설사님과 9시에 약속이 있어 무릉계곡에 도착하는데 너무 이른 아침이라 계곡 따라 올라 간다.

 

어둠속이라 위치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일주문 지나고 삼화사 거쳐 관음암에 도착 하니 날아 밝아 이 관음암 부터 무릉계곡 금석문을 찾아서 발걸음을 시작 한다.

 

 

관음암

 

 

관음암 장독대-거대한 암반을 통채로 조각해 장독대를 만들었다.

 

 

자연암반을 다듬어 7층석탑을 얹었다.

 

 

특이하게 산쥐들이 길을 인도하여 암자를 창건하였다 하여 쥐조암이라고도 불리는 관음암 자연 암반위에 설치한 칠층석탑과 장독대가 특이하게 눈에 들어 온다. 그리고 관음암 정자나무 옆 암반에는 뜻모를 글이 각자되어 있다. 관음암을 뒤로 신선바위로 향한다.

 

 

신선바위

 

 

신선바위에서 밑을 보니 낭떨어지 절벽이다.

 

신선바위에서 바라본 두타,청옥능선

 

신선바위-무릉계곡의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선선이 앉았던 자리로 천기가 흐르는 신성한 장소로 불리게 되었으며, 자식을 점지해주는 소원명당으로 유명한 곳이다. 깍아 지른 절벽과 저멀리 청옥산 능선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곳이다. 거북바위로 내려간다.

 

 

전망대에서 거북바위는 좌측 절벽 위로 보이나 내 사진기로는 어림 없다. 눈으로 도장을 찍고 하늘문으로 향한다.

 

 

하늘문 내려가는 길

 

 

하늘문

 

 

하늘문

 

 

하늘문

 

 

임진왜란때 피가 많이 흘러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피마름골에 자연적으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 열린 곳이다. 주위 절벽에 문처럼 걸쳐진 바위가 주위 절벽과 멋진 절경을 자아 내는 곳이다. 90도 가까운 경사에 300개 넘는 계단은 보는 이에게 아찔하게 만드는 곳이다. 하늘문을 내려와 신선봉으로 오른다.

 

 

문간재 이정표

 

 

신성봉

 

 

신선봉 정상 표지목

 

 

신선봉에서 바라본 두타,청옥 능선

 

 

신선봉 사랑바위와 광개토왕비 가 조망 된다고 적혀 있는데 내 눈에는 들어오지가 않는다. 청옥산에서 두타로 이어지는 능선과 그 앞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절경이 눈을 잡는 곳이다. 신선봉으로 올라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 쌍폭과 용추폭포로 향한다.

 

 

 

병풍 바위

 

 

장군바위

 

먼저 쌍폭 올라가기전 병풍바위와 장군바위를 감상 하고 선녀탕을 건너 쌍폭에 도착한다.  

 

 

현위치 선녀탕- 다리 밑이 선녀탕이다.

 

 

쌍폭-통수골물과 바른골물이 합쳐지는 폭포이다. 쌍폭을 보고 용추 폭포로 올라간다.

 

 

용추폭포

 

 

용추폭포 옆으로 유한준이 새겼다는 용추 각자

 

 

용추폭포 옆과 앞 암반에 많은 금석문들이 각자 되어 있다. 먼저 폭포 정면에 유한준 그리고 그이름 옆으로 용추라 각자 되어 있다. 1797년(정조 21년) 12월, 삼척부사이던 창애 유한준이 용의 덕을 바라면서 폭포의 이름을 짓고 새긴 글씨로 삼척부사 재임기간은 1796년 7월부터 1798년 12월까지로 2년 5개월이다. 아무리 부사라 해도 본인 이름을  저런 곳에 각자 해넣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천추에 까지 아름답게 이름이 내려갈지 모르겠다. 자고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인정해 주어야 아름다운 이름 으로 내려 갈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용추폭포는 청옥산에서 갈미봉에 이르는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바른골로 흘러내린 물이 떨어지는 폭포로 상,중,하로 된 3단 폭포이다.

 

 

용추폭포

 

 

용추폭포 옆 암반위의 용추 각자

 

 

용추폭포 옆 암반에 새겨진 용추와 이택주 이름-용추와 이택주 석문은 千秋에 남을 光名과汚名 이 한곳에 머문듯 하다. 이택주 이름은 금난정이 있는 무릉반석 바위에도 각자되어 있다. 얼마나 이름을 남기고 싶었으면 2 군데나 본인 이름을 각자 해 놓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과연 새긴 이름 수 많큼이나 길이 이름이 전해 질지 의문이다.

 

 

巡使李光正(순사이광정)-<조선(朝鮮) 때 임금의 명을 받고 사신(使臣)으로 나가는 재상(宰相)의 종2품(從二品) 임시(臨時) 벼슬> 이광정 과 그 외 사람들 천추에 이름을 남기고자 바위에 각자를 해 놓았다.

 

 

그래도 이곳 용추폭포의 금석문은 別有天地 (별유천지)가 아닌가 싶다. 3 단의 폭포를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 신선의 세계 별천지에 온듯한 느낌이다. 이런 금석문을 보고 싶은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 투타산성으로 올라간다. 삼국시대 진흥왕(550)때 쌓았다. 방어와 통치의 거점으로 잡았으며 식량의 저장고 역할도 하였다. 조망이 좋다.

 

 

두타 산성

 

 

두타 산성

 

 

두타 산성

 

 

두타산성 정상

 

 

두타산성과 조망

 

 

산성을 내려와 관음폭포로 향한다.

 

 

관음폭포 가기전 옥류동을 건너 간다. 물이 옥처럼 맑다 하여 옥류동

 

 

계단을 올라 가면 관음 폭포이다.

 

 

100m 높이의 관음폭포는 겹겹이 화강암층에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폭포로 수량이 풍부하지 않아 비가 온 다음날 관람하는 것이 좋다. 학소대로 내려 간다.

 

 

학소대 - 학과 관련이 깊은듯 싶으나 내용이 없다. 삼화사로 내려 간다.

 

 

삼화사 천왕문

 

 

 

삼화사 적광전

 

 

 

보물로 지정된 삼화사 삼층석탑-삼화사를 나와 해설사님을 만나기 위해 관리사무소로 내려 간다.

 

 

동안거사 이승휴 유적비를 지나고

 

 

두타산 삼화사 일주문 을 지나 관리 사무소로 내려 간다.

 

 

무릉계곡 명승지 관리사무소에서 설증남 문화관광 해설사님의 인도로 무릉반석으로 다시 올라 간다. 

 

 

무릉반석 암각서 하면 단연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글자 인데 양사언이 새겼다.정하언이 썻다. 논란이 많은 글자인데 해설사님은 개인적인 생각이라며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부사 재직시 썻다는 설에 무게를 두신다. 나도 듣고 보니 그렇다는 생각이 드나  이 무릉계곡을 더 내세우기 위해선 양사언 쪽에 더 편을 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4대 명필 글을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명필 양사언 (楊士彦: 중종12년 1517 - 선조17년 1584)의 호는 봉래(蓬萊)이며, 본관은 淸州로 이조중기의 문관, 글씨를 잘써서 金救, 韓石峯, 金正喜와 더불어 이조중기의 4대명필로 꼽힌다.

 

 

동해시는 글자가 마모되는 것을 보전 하기 위해 1995년도에 모형 석각을 만들어 보전 한다고 한다.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금란정-한말까지 유림들은 향교 명륜당에 모여 유학강론에 전념하였으나 한일합병을 당하여 폐강하기에 이르자 이에 분개하여 우의를 다지는 금란계를 결성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건립하기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일본 관헌들에 의해 제지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금란계원과 그 후손들이 선인의 뜻을 계승하여 정자를 짓기로 합의하고 1949년 봄에 건립하였고 1956년 9월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금란정 뒤에 있는 바위 전체가 사람 이름으로 도배가 되었다.

 

 

금란정 뒤에 있는 2개의 바위 전체가 사람이름으로 도배가 되었다. 혹 금란계원들은 아닌지 모르겠다.

 

 

드디어 오늘 답사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명 무릉반석, 450여㎡(1,500여평)의 그 너른 바위에는 수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연암이 일찍이 “쓸데없는 관직”이라고 일갈한 바 있는 조선시대 討捕使(토포사) 무리의 이름이 가장 많다. 지금으로 치면 검찰 경찰 등 힘깨나 쓰는 사정기관 사람들이다.

 

그 많은 이름 가운데 가장 크고, 멀리서도 한 눈에 띄는 이름은 兪漢雋(유한준), 兪라는 글자의 어느 획은 주먹이 들어갈 만큼 깊고 크고, 한 글자의 세로길이는 가랑이를 넓게 벌려야 될 정도이다. 유한준의 각자는 용추폭포와 무릉반석 2군데에 각자 되어 있다.  이 많은 암각서 중에 옥석을 구별 하기는 어렵지만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암각서 부터 나열 해본다.

 

 

먼저 의관 양성사-의관 [ 議官 ] 조선 시대 말 중추원(中樞院)의 한 벼슬. 고종 32년(1895)에 두었다가 광무 9년(1905) 찬의(贊議)로 고쳤음.

가치의 기준은 글씨체에 있다. 주위의 다른 글씨와 다르게 돋보이는 글씨체이다.

 

 

무릉 반석 암각서중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다음으로 품격 높은 석문이다. 雲 潗 龍 高  <화계> 무릉계곡의 물 흐르듯 일필 휘지로 써내려간  모습이 생생하게 남는 글씨 이다. 구름운자는 그대로 구름모습이다. 높은 앞산을 넘어오는 구름이 마치 거대한 용이 넘어 오는 모습 같다. 얼마나 멋진 모습 입니까 이런 금석문을 보고 싶은 것이다.

 

 

안개낀날 무심코 이곳을 찾아와  앞산을 바라보다 산을 넘는 구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해설사님 마치 용이 산을 넘는줄 알고.... 작자도 이 모습을 보고 석문을 새겼으리라...

 

 

무릉 반석중 2개의 그림중 하나로 난 모습이 살아 움직이는듯  하다. 금난계원이 아니라 난 그림에만 가치를 둔다. 난을 그리고 계원 이름을 적을것이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는 우국충절의 시를 적었으면  즉 한일합병을 당하여 폐강하기에 이르자 이에 분개하여 우의를 다지는 금란계를 결성하였다면 말이다.

 

 

산고수장- 선비의 고고함을 나타내는 글

 

 

제일 산천 -  잘 보이지가 않으나  무릉계곡의 으뜸임을 강조 한글  川 자 위에 김머시기 이름이 덧씨여져 있다.

 

 

또 다른 난 그림 위치 설정과 난 모습이 제되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여기 까지는 아름다운 암반위에 새긴 암각서로서 가치를 둘수가 있다. 이후 각자들은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금란계원 명단에 대해 설명 하시는 해설사님

 

 

 

금란 계원 명단 관직이 있었던 사람은 이름 위에 관직명도 각자 되어 있다.

 

 

금란 계원이 있다면 향난계도 있다. 좌측 년도가 단기로 표시된 것이 특이 하다.

 

 

임인년생 동기생들

 

 

강후동유  회원들

 

 

삼척부사 유한준 천추 즉 가을이 천번이 바뀌어도 지워지지 않을 이름이다.

 

 

잘 보시죠 용추폭포 암반 용추 각자 좌측에 새겨졌던 이택주 이름이 이곳 에도 새겨져 있다.제일 오른쪽 李宅胄(이택주)

 

 

동령계원

 

 

토포사 에 대해 설명 하시는 해설사님

 

 

토포사 명단

 

 

오씨 집안 가족 이름

 

 

두고 두고 이름이 남을 동신 계원

 

 

경인창우갑원들

 

 

 

사축년 사월 에 새긴 명단 ? 

무릉계곡 의 아름다운 무릉반석위에 새겨진 암각서들에 대해 해설을 듣고 많은 것을 생각한다.  삼화사 에서 해설을 마치고 해설사님과 헤어져 마지막 금석문을 찾아 호암소로 향한다.

 

 

호암소 유래 안내판

 

 

호암소

 

 

호암소-무릉계곡 관리사무소에서 아래쪽으로 205m쯤 아래 다리밑 계곡에 있는 소. 소양옆이 절벽으로 되어 있는데, 옛날 호랑이가 건너뛰다가 빠져 죽은 소라는 데에서 유래한다. 호암소는 김효원(金孝元)이 임경대(臨鏡臺)로 개명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전설ㆍ옛날 도술에 능한 고승이 이 곳을 지나다가 호랑이가 해치려 하여, 고승은 신통력을 발휘하여 소를 훌쩍 건너 뛰었는데 호랑이가 뒤따라 건너뛰다가 고승의 발길에 채여 소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소 옆의 암벽에 虎岩(호암)이라 새겨 놓은 글씨가 남아 있어 흔히 호암소 대신 호암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이 글씨는 삼척부사로 왔던 미수 허목(許穆)의 글씨라고 전하는데, 호암은 김효원의 두타산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3~4m 위에 中臺洞門(중대동문)이란 글씨도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오혁(吳奕)의 글씨라는 설이 있다.

 

 

虎岩(호암)-삼척부사로 왔던 미수 허목(許穆) 글씨 

 

 

中臺洞門(중대동문)-오혁(吳奕)의 글씨 라고함

 

 

무릉계곡의 무릉반석 제일의 암각서 는 단연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글자이다. 글자 그대로 이 무릉계곡 전체가 무릉도원 즉 별천지 였다.

 

시작점 용추폭포 앞에 새겨진 別有天地  금석문 즉 별천지 무릉계곡을 따라 내려와 무릉반석위에 새겨진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금석문에서 끝을 맺는 발걸음 신선이 되어 별천지를 헤메다 온 느낌이었다.

 

그러나 무릉반석 위에 새겨진 많은 이름의 각자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정말 많은 것을 ...

권력의 힘에 의해,금전적 보답으로,지시에 의해,부탁에의해 千秋 까지 남기고자  단단한 암반위에 힘들게 이름을 새겨준 석공이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이런말이 생각 난다  遺芳百歲 遺臭萬年(유방백세 유취만년) 꽃다운 향기는 백대를 가지만 더러운 악취는 만년동안 남는다.

 

천추까지 남기고자 반석위에 새긴 가족이름,계원명단,동기이름 그리고 권력의 이름 들이  千秋 에 남을 汚名 으로 변해 遺臭萬年 즉 더러운 악취가 되어 만년동안 풍기는 것은 아닌지....

 

끝으로 정성어린 해설을 해주신 동해 무릉계곡 명승지 관광해설사 설증남 선생님 및 여러 해설사 모든 분 들에게 감사의 글을 전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