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계룡산(鷄龍山)

[스크랩] 계룡산 용산구곡 (2010.03.07)

느낌표!! 2010. 3. 9. 23:30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유익한 테마산행]

 

 - 계룡산 용산구곡 편-

 

일시 : 2010.3.7.(일)

장소 : 상신리-계룡산 용산구곡-큰배재(점심) <여기까진 동행>

(많은 분들) 신선봉-장군봉-박정자

(가을하늘과 애다님) 상신리 헤집고 다니기

참가인원 : 23명

날씨 : 쌀쌀 추움 바람 흐림, 오후에 갬

걸음수 : 21,000보

 

우리땅에 살아가면서 가끔 우리 선조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았나 하고 생각해 볼때가 있습니다.

계룡산에 용산구곡이라는 숨겨진 장소가 있습니다.

한편 금잔디 고개 너머로 갑사구곡이라는 명소도 있습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계룡산 자락에 살았지만 취음 선생은 애국의 길을 걸으며 민족번영을 염원했고, 또 한 사람 간옹 윤덕영은 매국의 길을 걸으며 일신의 영달과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습니다.

두 사람이 살아온 모습을 알아보면서 인생에서 무엇이 되느냐 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보고, 느껴보는 가치있는 그 현장에 갑니다.

바로 용산구곡입니다.

 

산행 행사명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유익한 테마 산행>입니다.

오늘 산행에 글자 하나 버릴 것 없이 딱 들어맞는 제목입니다.

입춘은 오래 전에 지났고 우수와 경칩도 지났건만 날씨는 쌀쌀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진정 산을 좋아하는 우리 님들은 날씨와 관계없이 상신리에 모였습니다.

 

자!~ 용을 찾아 출발합니다~~

 

1곡을 찾기 전 상신리 장승 관상 좀 보고 갑니다.

봉의 눈에 주먹코, 토끼 앞니네요.

무서운 건지, 귀여운 건지...

 

 

지하여장군은 눈웃음까지 치네요..(아잉~ 언니 왜 그래?)

 

유학동문, 상신소 입구

 

용산구곡, 1곡 심용문

,,. 고어체(古語體)와 이자체(異字體)로 새겼습니다.

 

신야춘추 도원일월(莘埜春 桃源日月)

 

천자문에 磻溪伊尹(반계이윤)이 나옵니다.

주문왕은 반계(磻溪)라는곳에서 강태공을 만났고,

은왕은 신야(莘野)라는 곳에서 이윤을 맞이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주문왕이 반계로 낚시하던 강상(태공망)을 찾아간 사실은 매우 유명하고,

은탕왕이 신야에 은거하던 이윤을 세번이나 찾아가 맞이하여 재상으로 삼음으로써, 이윤이 은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명재상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신야는 학덕높은 선비가 은거하는 지명을 상징하고, 도원은 무릉도원을 의미합니다.

춘추는 계절을 나타내는 말로 역사, 긴시간 등을 의미하고, 일월은 날마다 달마다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 신야춘추 도원일월은 평안하고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은거지에서 계절따라 시간따라 한가하고 행복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 같습니다.

상신리는 풍수지리상 수구가 여러 번 막혀있어 예로부터 조용하고 한가롭게 은거하기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구룡사지 당간지주

계룡산은 특이하게 동서남북에 모두 사찰이 있는 곳입니다.

동쪽에 동학사 서쪽에 갑사, 남쪽에 신원사, 북쪽에 구룡사

이 가운데 가장 큰 절이 구룡사였습니다.

당간의 크기만 봐도 당시 사세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절이 망한 이유는 계속 불이 나서 그랬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이곳 상신리가 토속신앙의 기가 강한 곳이라서 그렇다고도 합니다.

절구경 중의 으뜸은 바로 망한 절, 폐사지 구경입니다.

(하산해서 구룡사지를 살펴봅니다.)

 

여천

예전에 낮에 빨래하고 밤에는 멱을 감았을 상신리 남성출입금지 구역

 

2곡 은용담

 

궐은

 

3곡 와룡강

 

자양산월동원만천 백록담파영방사해

 

탄금

해서체로 쓴 대자(大字)인데, 이 정도 크기의 글을 쓰려면 앉아서 쓰는 것이아니라 걸어다니면서 써야합니다.

 

4곡 유용대

 

[강산풍월 한자주인(江山風月閒者主人)]

강과 산은 본래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느끼면서 즐길 줄 아는,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만이 바로 강과 산과 바람과 달의 주인이 됩니다.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

풍치있는 자연 경치와 더불어 평안하고 조용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합니다.

주자(朱子)의 정사(精舍)라는 시의 마지막 구에서 가져와 새긴 것입니다.

 

금서사십년 (琴書四十年) / 거문고타며 공부한지 사십 년

기작산중객 (作山中客) / 나도 모르게 산중사람 다 되었어

일일모동성 (一日茅棟成) / 띳집 짓는데 하루면 족하니

거연아천석 (居然我泉石) / 문득 나와 샘과 돌이 한 몸이네

 

(허균 지음, 이갑철 사진-한국의 누와정 32쪽)

 

산수 중에 오래도록 머물고자 했던 당시 선비의 욕망과 옛 성현의 은일한 행적에 대한 사모의 정을 이 글자에 담아 새긴 것입니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입니다.

 

[봉우 권태훈(鳳宇 權泰勳)]

취음 권중면 선생이 나이 마흔에 얻은 아들입니다.

1980년대 중반 베스트셀러 단()의 실제인물이기도 합니다.봉우 권태훈 선생의 좌우명이 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去去去中知行行行裏覺) ‘가고 가다 보면 알게되고, 다니고 행동하는 와중에 깨닫게 된다라고 합니다.

상신리 주민들 증언에 의하면 학골선풍(鶴骨仙風)으로 마치 선계에서 지상에 내려온 신선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흰 수염에 등을 덮는 흰머리카락, 그리고 하얀색 한복을 입고 다니셨다 합니다.

 

[만취 최종은(晩翠崔鍾恩)]

최종은 선생은 상신리에 거주하였으며, 한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는 용산구로회 (龍山九老會) 회원으로 활동한 사람입니다. 만취는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푸르름을 뜻하는 말로 나이들어서도 지조를 바꾸지 아니하고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상신리 최종은 선생댁 마루에 지송백(知松柏)이라는 글씨가 걸려있었습니다.

논어 자한편 27번째 문장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歲寒然後 知松柏 )” 에서 가져온 말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진가를 알게된다는 뜻입니다.

만취와 지송백은 그 의미가 통하는 말입니다.

최종은 선생은 1915년에 태어나서 평생을 꼿꼿한 선비의 모습으로 사시다가 2002년 돌아가셨습니다.

취음 선생에게 배웠고, 봉우 선생과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현재 상신리 집은 개량해 막내아들 내외분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4곡 유용대

 

5곡 황룡암

오방색 중 황색은 중앙을 상징합니다.

구곡의 한가운데인 오곡이기에 청룡, 백룡이 아닌 황룡으로 지은 것 같습니다.

참고로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입니다.

 

권중면 취음 임신 팔월

임신년 팔월은 1932년 가을 경입니다.

취음 권중면 선생 78세때, 아들인 봉우 권태훈 선생 33세 때입니다.

갑사구곡 보다 5년 늦게 새긴 것으로, 갑사구곡이 새겨졌다는 소문을 듣고 새긴 것 같습니다.

 

호서 제일 산수

제일 산수라는 각서를 먼저 새겼는데, 누군가 제일산수라는 말에 이의가 있어 호서라는 각자를 나중에 보태어 새긴 듯 합니다.

처음부터 여섯글자를 같이 새겼다면 사진 우측부터 호서제일산수라고 두자씩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자체가 다르고 글자 위치도 어긋나는 걸로 봐서 누군가 후에 부각한 것입니다.

 

태극암

 

궁산을수

산태극 수태극 (山太極水太極) 지형을 상징합니다.

풍수지리에서 산줄기와 물이 어우러져 휘둥그스름하게 굽이져 태극모양(요새 표현으로 에스라인~샤방샤뱡~~)을 이루는 지세를 말합니다.

산수회포(山水),산래수회(山來水回)도 같은 표현입니다.

 

5곡의 계곡물이 아래 사진 처럼 에스(S)자를 그리며 흘러내립니다. 

 

 6곡을 향해 보무도 당당하게

찾는 재미, 새긴 글의 뜻을 아는 재미,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재미

 

6곡 견룡소

 

 

용 한마리가 올라가고 있네요

안 보이시는 분?

 

 

파란암(破卵岩)

아마추어님이 애지중지하는 계란 깨뜨리면 어떻게 합니까아~~~~

 

7곡

 

맞은편 바위에 희미하게 새겨진 운용택

칠곡 이라고 새긴 아래 공간이 넉넉함에도 새길 때 자리잡기가 어렸웠는지 이곳에 새겨두었습니다.

 

 

 

 

8곡 비룡추

이번 산행에서 찾느라 제일 많이 헤맨 8곡

 

 

비룡추 각서에 따라쓰기를 하다 물에 빠진 돌까마귀 대장님

용산구곡을 위해서 몸바치는 대장님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몸 바쳐서... 몸 바쳐서...(음~ 논개?) 

 

드디어 9곡 신룡연

 

구룡조천(九龍朝天)

구룡(九龍)은 글자 그대로 아홉마리 용이라는 뜻보다는,

()라는 숫자는 홑수의 마지막이므로 많다라는 의미입니다.

명나라 때만 해도 중국에 다녀오는 사신들의 행렬을 조천(朝天)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천은 하늘처럼 높은 황제를 알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청나라로 바뀌고 부터는 연행(燕行)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의 수도 북경을 당시에는 연경(燕京)이라고 불렀으니 그저 연경에 다녀오는 행렬이라는 뜻입니다.

은근히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얕잡아 보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구룡조천은 많은 용들이 승천해서 옥황상제를 알현한다는 의미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낼 영재들이 많이 나와서 나라와 민족이 번영하는 것을 바라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용산구곡을 올해도 이렇게 과락없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큰배재까지 올라 점심을 먹은 후, 다른 분들은 장군봉으로 가시는데 저는 상신리 마을에 몇군데 더 볼것이 있어 산을 내려옵니다.

애다(애가 다섯)님이 고글을 등산 도중 잃어 버렸다고 같이 내려가면서 찾아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어느 부근에서 분실했는지, 또 어느 길로 다녔는지를 알지 못하니 이건 서울에서 김서방찾기입니다.

내려오면서 몇군데 살펴봤으나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이글을 읽는 분 중에 상신계곡에서 고글 습득하신 분이 계시면 애다님께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댓글 달아주세요)

(때론 이런 희박한 확률이 기적이 되어 정말로 될 때가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음~ 옴사?)

 

상신리 만취 최종은 선생댁입니다.

안채와 사랑채 도리에 단기년도로 지은 해가 적혀있습니다.

안채는 1957년, 사랑채는 1935년이었습니다.

최종은 선생이 2002년도에 돌아가신후 현재 막내아드님, 며느님 되시는 분들이 역귀농해 살고 있었습니다.

개량을 많이 했지만 가구(家構)는 예전 그대로 입니다.

 

어처구니와 맷돌

아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돌릴 수 없으니 황당하겠지요.

고 최종은 선생댁에서

 

봉우사상 책자

정재승 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재승님은 봉우 권태훈 선생의 제자로 현재 상신리에 거주 중이며,

봉우사상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종은 선생댁 고서

상단 우측에 최치웅 인이 찍혀 있는 것을 보니 선조로 부터 물려받은 책입니다.

 

만취 최종은 선생은 40여년간 일기를 쓰셨다고 합니다.

 

1976년도 일기입니다.

 

한시도 잘 지어셔서 수많은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셨다고 합니다.

집안에 상장도 수두룩 합니다.

 

 단기고사라는 옛책도 있습니다.

옛 책이 매우 많았는데, 단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빌려가서 되돌려 주지 않은 귀한 책들이 많다고 합니다.

또한 최종은 선생 사망후 집안의 책자, 액자 등이 많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용산 구로회 회원명단입니다.

9명이 회원 정족수이나, 작고하시는 분들이 생겨  새로운 인사를 초대해 명단의 인원은 9명이 넘습니다.

계룡산 자락에서 지동도합(志同道合)한 은사들이 모여 전통과 학문을 논하고 한시를 지으며 사진 분들입니다.

 

최종은 선생 막내아드님(좌), 막내 며느님(우)과 함께

 

상신리를 진짜로 헤매는 애다님

처음에는 고글 분실(이건 못찾음), 두번째는 스틱 분실(이건 되찾음), 세번째는 저를 분실해 상신리를 헤메고 다니는 애다님... 

 

봉우 권태훈 선생 묘소입니다.

묘소 아래 후학들이 거주한다는 집이 있었으나 문이 잠겨있어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봉우 선생 탄신 110주년이었던 모양입니다.

여전히 후학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쨘!~~드디어 도착한 폐사지

상신리 노인회관(이름이 아주 부르기도 듣기도 좋은 선유당(仙遊堂))옆길로 100여미터 들어가서 만났습니다.

당간지주가 버스 종점에 있는데, 여기까지가 사역(寺域)이라면 참 큰절입니다. 

 

 

봉우사상연구소

정재승 이라는 분이 공부하는 곳입니다.(최종은 선생댁에 책 드린 분)

마침 외출중으로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상신리에서는 <공부하는 사람집>이라고 통하더군요

 

조용헌의 고수기행이라는 책입니다.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이라는 칼럼을 연재하는 분입니다.

이분이 쓴 책 고수기행 150쪽에 정재승 소개편이 나옵니다.

 

 바로 이 분입니다. 정재승

뼈대있는 신선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찾아 보세요

(이렇게  써두면 정말 찾아보시는 분 있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습니다.)

 

아침에 못보고간 취음동천(翠陰洞天)입니다.

장군봉으로 내려와 차량으로 데리러 와주신 까르페디엠님 만나서 같이 찾아봤습니다.

취음은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나 수풀 또는 나무의 그늘을 뜻하는 녹음(綠陰)과 통하는 뜻입니다.

 

동천은 속계를 떠난 신선의 경계입니다. 원래 논밭이 많은 들마을은 리()라 하고, 수목이 우거진 큰 마을은 촌(), 내를 낀 골짜기 마을을 동()이라고 했습니다.

 

용산구곡 총정리 내용입니다. 갑사구곡과도 비교를 해봤습니다.

 

[계룡산 용산구곡과 갑사구곡]

  

용산 구곡

명칭

갑사 구곡

취음 권중면

(1855~1936 : 82)

제작자

(생몰연대, 나이)

간옹 윤덕영

(1873~1940 : 68)

대한제국 내부 판적국장.

을사늑약으로 낙향 은둔.

교육으로 제자 양성

말년에 빈곤으로 병마에 시달림

제작자 경력

순종비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로 1910년 국권 강탈 때 순종에게 옥새 날인을 강요. 이 공로로 자작, 포상금 수여 등 온갖 부귀영화를 누림

자주 독립,민족 번영

후학 교육

(선도,단학)

주요 관심사

일신 영달, 성인의 도

(중용, 주역, 천문,

유불선 합일)

임신년 팔월

(1932년 가을)

권중면 78세 때

권태훈 33세 때

제작 일시

정묘년 동계

(1927년 겨울)

 

윤덕영 55세 때

봉우 권태훈 45세때 득남하였으며, 봉우선생은 1984년도 소설 단()의 실제인물임. 후손과 제자들이 현재 전국각처에서 단학수련 중

후손 상황

증손자들이 경기도 파주에 있는 윤덕영의 땅을 되돌려 달라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 중임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상신계곡(설희계곡 큰골)

위치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계곡

초서

자체

해서

유학동문 (丣学洞門)

취음동천 (翠陰洞天)

입구

 

삼갑동문 (三甲洞門)

간성장 (艮成莊)

심용문 尋龍門

1

용유소 龍游沼

은용담 隱龍潭

2

이일천 二一川

와룡강 臥龍岡

3

백룡강 白龍岡

유용대 龍坮

4

달문택 達門澤

황용암 黃龍岩

5

금계암 金鷄

견용소 見龍()

6

명월담 明月潭

운용택 雲龍澤

7

계명암 鷄鳴

비룡추 飛龍湫

8

용문폭 龍門瀑

신용연 神龍淵

9

수정봉 水晶峯

신야춘추

 

(莘埜春)

 

도원일원

 

(桃源日月)

 

 

 

 

자양산월동원만천

 

(紫陽山月同圓萬川)

 

백록담파영방사해

 

(白鹿潭波盈放四海)

기타

 

새긴 글

 

비교

 

 

 

 

 

 

<- 용산구곡

 

 

 

 

 

   갑사구곡 ->

[일중석 (一中石)]

갑생삼각 (甲生三角)

함삼위일 (函三爲一)

일관중심 (一貫中心)

윤집궐중 (允執厥中)

사십사구 (四十四口)

간산수석 (艮山壽石)

간옹명 (艮翁銘)

호서 제일 산수

(湖西 第一 山水)

인의석(仁義石)

행인도 달천하

(行人道 達天下)

궁산을수(弓山乙水)

순화림원 (舜華林園)

수월암(水月)

태극암 (太極岩)

은계 (銀溪), 용화(龍華)

명월(?)(?)보감한

(明月(?)(?)寶鑒閈)

간도광명 (艮道光明)

구룡조천(九龍朝天)

삼갑동주 (三甲洞主)

궐은 (厥隱)

공우탑 (功牛塔)

방화수류 (訪花隨柳)

군자대 (君子臺)

거연아천석

(居然我泉石)

益口舊谷 君子臺

鷄龍新面 艮成莊

탄금 (彈琴)

갑탁원 (甲坼園)

강산풍월 한자주인

(江山風月 閒者主人)

天章昭回於上

文化成于下

역사의 심판은 냉엄합니다.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계룡산 자락에서 살았지만 한사람은 애국의 길을 걸으며 고생을 했고, 또 한사람은 매국의 길을 걸으며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땅을 사는 우리들은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을 기억을 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사실을 후손들에게 역시 정확하게 물려줄 것입니다.

인생은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감사합니다. "끝"

 

 

 

                  2010.03.07.

 

                 - 가을 하늘 -

 

출처 : 가 을 하 늘
글쓴이 : 가을하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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