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계룡산(鷄龍山)

계룡산 용산구곡과 갑사구곡

느낌표!! 2010. 4. 14. 13:57

 

<용산구곡에서 갑사 구곡까지>


산행일자---2004년3월28일,일요일 맑음

산행거리---5.4km(이정표 거리),만보계 거리(11.84km ,26322보)

산행인원---느낌표!

산행시간---8시간 25분(휴식과 점심,구곡 찾아 헤메는 시간 모두 포함)

산행경비---유성에서 상신리행 버스 1200원,상신 매표소 입장료 1600원,갑사에서 유성행 버스 1900원


<산행기>


회사 사정으로 모처럼 일요일날 쉬게 되어 마음에 두고 있던 계룡산 으로 향합니다.유성에다 주차를 하고 유성 파출소 앞에서 07시50분 발 송곡,상신리행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사행 버스가 먼저 도착 등산객 대부분이 버스를 타고 떠나고 상신리행 버스에는 일반인과 부부 등산객만이 승차를 한다.


따스함이 창가로 스며들고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하신리를 거쳐 상신리에 도착(08:44) 장비를 점검하고 메모지를 챙겨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은 이정표 거리로 5.4km 험한 구간이 전혀 없는 곳으로 널널하게 잡아도 3시간이면 족하는 코스이기에 여유를 갖고 상신리 구곡과 갑사구곡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

 

용산구곡을 선정한 취음 권중명 선생(1856~1938)

조선의 학자로 한양에서 태어나 조정에서 여러내직을 거쳐 외직으로 황해도 평산군수로 나갔다가 능주군수로 있을 때 한일합방의 비보를 듣고 관직을 버린후 비통에 젖어 은거해 있다 1916년 봄 계룡산 상신리로 들어 왔다고함.그의 학문을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 사랑채에 서당을 차렸으며 망국의 서러움 속에서 두문불출로 선비로서의 절개를 지켰으며 나라의 운명이 풀릴날을 기다리다 서광을 보지 못하고 타계한 비운의 선비다.시집이52권 문집이14권 그리고 기행문이 1권 모두 67권의 문집이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한국전쟁당시 공산군이 선생의 집을 점거 하여 3개월 간 사용하며 휴지감 땔감으로 모두 풍지박산 되고 기행문인 금강산유람기 한권만 전할뿐 66권은 분실되었다고함.그는 1916년 회갑되던 해에 계룡산 상신리에 들어와 집 사랑채에 서당을 차리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살다 83세에 돌아 가셨다.그는 이곳에 살면서 1932년 "용과함께 신이 숨을 쉬는 곳"이라는 의미를 붙여 상신리계곡에 9곡을 선정하여 이를 바위에 새겼으니 바로 용산구곡이다.그의 장남은 (단丹)의 저자이자 우리나라 단학의 대가인 봉우 권태훈씨이다.현재 권태운옹은 사망하고 그의 부인이 상신리에 살면서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단의 명맥을 이어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고 하는데 제가 용산구곡을 확인하고 찾아가 보았으나 그 당시 부인을 뵙지 못하고 제자인 듯한 청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나왔던 기억이 남니다.

.

상신리 당간지주

상신리 버스 종점에 내리니 계룡산록의 가장 큰 절이던 구룡사지(九龍寺址)표지석과 당간지주가 아침 해살에 눈부시다.마을 길을 따라 마을 입구로 내려간다.마을 입구에는 솟대와 선돌, 상신리 유래비가 있는 곳에서 조금더 내려가면 오른편으로 논 자락끝에 등그런 바위가 있는데 이바위가 상신리 구곡중 제 1곡인  심용문 (尋龍門)이다. 

 

용산구곡1곡 심용문,각자가 뚜렸하다.

 

바위에는 상신구곡(용산구곡)은 여기서부터라는 1곡의 글씨는 찾았는데,상신구곡을 찬 하는 취음 권중면의 시구도 새겨져 있다 했는데 바위위에 올라가서 확인 해도 찾을 길이 없고... 무심코 지나쳤던 바위가 상신구곡중 제1곡이라니 새삼스럽다.바위위에 자라는 측백나무가 이채롭다.거대한 용이 알에서 깨어나 서서히 승천의 준비를 하는 단계가 아닌지..... 유학동문, 상신소 입구

 曲,曲,曲. 고어체(古語體)와 이자체(異字體)로 새겼습니다.

취음동천(翠陰洞天)- 취음은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나 수풀 또는 나무의 그늘을 뜻하는 녹음(綠陰)과 통하는 뜻입니다.동천은 속계를 떠난 신선의 경계입니다. 원래 논밭이 많은 들마을은 리(里)라 하고, 수목이 우거진 큰 마을은 촌(村), 내를 낀 골짜기 마을을 동(洞)이라고 했습니다

 

신야춘추 도원일월(莘埜春 桃源日月)-천자문에 磻溪伊尹(반계이윤)이 나옵니다.

주문왕은 반계(磻溪)라는곳에서 강태공을 만났고, 은왕은 신야(莘野)라는 곳에서 이윤을 맞이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주문왕이 반계로 낚시하던 강상(태공망)을 찾아간 사실은 매우 유명하고, 은탕왕이 신야에 은거하던 이윤을 세번이나 찾아가 맞이하여 재상으로 삼음으로써, 이윤이 은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명재상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신야는 학덕높은 선비가 은거하는 지명을 상징하고, 도원은 무릉도원을 의미합니다. 춘추는 계절을 나타내는 말로 역사, 긴시간 등을 의미하고, 일월은 날마다 달마다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즉, 신야춘추 도원일월은 평안하고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은거지에서 계절따라 시간따라 한가하고 행복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 같습니다. 상신리는 풍수지리상 수구가 여러 번 막혀있어 예로부터 조용하고 한가롭게 은거하기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여천-예전에 낮에 빨래하고 밤에는 멱을 감았을 상신리 남성출입금지 구역

제2곡 은용담(陰龍潭) 이라는  한자 글이 선명하다

계곡으로 내려가 계곡을 따라 한발 한발 용의 물길을 따라 올라간다.매표소가 보이고 매표소로 향하는 등산객들이 쳐다본다.등산길은 그곳이 아니라는 듯.... 매표소에서 한50m 떨어진곳에 시멘트 보가 있는 곳에 도착 하니 반들 반들한 바위위에 2곡 은용담(陰龍潭) 이라는  한자글이 선명하다.상신9곡중 제2곡인 은용담이다.꿈틀 꿈틀, 용이 서서히 움직이는 모습이 그려진다.용이 움직이면서 계곡물이 흐려졌다.(ㅎㅎ,위쪽에서 수해복구 공사중이란다)

제3곡 와룡강

매표소에 도착해 입장료 1600원을 지불하며 상신구곡에 대해 물으니 자세히 위치를 알려 주신다.5곡 이후 부터는 아마 찾기가 매우 힘들거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말에  고마은 마음이 든다.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물이 깊고 주위에 덤불이 쌓인곳을  지나치라면 애로점이 많다.계곡 오른편으로 임시 가옥이 있는데 잠사란다.잠사 건물 있는 계곡에 도착하니 바위와 계곡물이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답다. 

 

<紫陽山月同圓萬川  白鹿潭波放四流><자양산에 높이 뜬 달은 만천을 비추고 백록담의 물은 넘쳐서 사방으로 흐르네>

이곳이 제 3곡인 와룡강(臥龍岡)이다.3곡, 와룡강 이란 글이 선명하다. 계곡물에 살짝 젹셔진 시구도 보인다.<紫陽山月同圓萬川  白鹿潭波放四流> <자양산월동원만천 백록담파영방사해(류)><자양산에 높이 뜬 달은 만천을 비추고 백록담의 물은 넘쳐서 사방으로 흐르네>용이 땅에 내려오면 백일 동안을 물 속에 잠겨있다가 움직이는 터전을 마련 한다고 한다. 이곳 와룡강이 상신구곡으로 들어선 용이 서서히 움직일 채비를 하는 곳이 아닐런지....

 

제4곡 유룡대(遊龍坮)


한없이 맑은 계곡물과 파아란 버들강아지에서 오는 봄을 실감한다.3곡을 뒤로하고 올라가니 넓은 둠벙이 나온다.제4곡인 유룡대(遊龍坮)이다.바위에 새겨진 한자가 희미해 물을 뿌려 확인을 해본다.바위와 둠벙이 아름답다 둠벙 앞쪽에는 꼭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부러운 눈으로 용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맑은 계곡물과 노오란 생강나무꽃이 어우러진 모습에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제4곡 유룡대, 용이 계시는 둠벙인 셈이다.쉬!!!!!!!!!조용이, 거북이 바위도 조용히,숨을 죽이고 다시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강산풍월 한자주인(江山風月閒者主人)]-강과 산은 본래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느끼면서 즐길 줄 아는,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만이 바로 강과 산과 바람과 달의 주인이 됩니다.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

풍치있는 자연 경치와 더불어 평안하고 조용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합니다. 주자(朱子)의 정사(精舍)라는 시의 마지막 구에서 가져와 새긴 것입니다.

금서사십년 (琴書四十年) / 거문고타며 공부한지 사십 년

기작산중객 (作山中客) / 나도 모르게 산중사람 다 되었어

일일모동성 (一日茅棟成) / 띳집 짓는데 하루면 족하니

거연아천석 (居然我泉石) / 문득 나와 샘과 돌이 한 몸이네

 (허균 지음, 이갑철 사진-한국의 누와정 32쪽)

 산수 중에 오래도록 머물고자 했던 당시 선비의 욕망과 옛 성현의 은일한 행적에 대한 사모의 정을 이 글자에 담아 새긴 것입니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입니다.

 [봉우 권태훈(鳳宇 權泰勳)]

취음 권중면 선생이 나이 마흔에 얻은 아들입니다.

1980년대 중반 베스트셀러 단(丹)의 실제인물이기도 합니다.봉우 권태훈 선생의 좌우명이 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去去去中知行行行裏覺) ‘가고 가다 보면 알게되고, 다니고 행동하는 와중에 깨닫게 된다’라고 합니다.

상신리 주민들 증언에 의하면 학골선풍(鶴骨仙風)으로 마치 선계에서 지상에 내려온 신선과 같은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흰 수염에 등을 덮는 흰머리카락, 그리고 하얀색 한복을 입고 다니셨다 합니다.

 

제5곡 황용암(黃龍岩).5곡 황룡암이란 글은 등산로 방향 벽면에 새겨져 있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좌측 계곡쪽을 바라보면 계곡 바위위에 등그런 바위가 놓여진 곳이 제5곡인황용암(黃龍岩)이다.용은 백년을 땅에서 살다가 하늘의 부름을 받고 승천한다고 한다.등구런 바위 주위로는 많은 글자들이 각인 되어 있다.등구런 바위밑에 <弓山乙水>란 글을 보고 이곳이 제5곡 인것을 확인한다.등산로 방향으로 서있는 바위에 5곡 황룡암이란 글이 있다는데 마모가 심해 가까이서 확인 하지 않으면 찾기가 힘든곳이다.등그런 바위뒤로는 그야말로 용이 있을 법한 멋진 둠벙이 자리잡고 있다.4곡에서 5곡은 거리가 짧아 그길이가 약 40m 정도 되는것 같다.용이 구름을 바라보며 하늘에 올라갈 계시를 은근히 기다리는 듯하다.

5곡 황룡암 -오방색 중 황색은 중앙을 상징합니다. 구곡의 한가운데인 오곡이기에 청룡, 백룡이 아닌 황룡으로 지은 것 같습니다. 참고로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입니다.

 권중면 취음 임신 팔월-임신년 팔월은 1932년 가을 경입니다. 취음 권중면 선생 78세때, 아들인 봉우 권태훈 선생 33세 때입니다. 갑사구곡 보다 5년 늦게 새긴 것으로, 갑사구곡이 새겨졌다는 소문을 듣고 새긴 것 같습니다. 서기 1932년으로 일제치하 22년, 취음선생의 연세 78세때입니다. 취음선생은 1936년 돌아가셨으며 당시 81세였습니다. 

 호서 제일 산수-제일 산수라는 각서를 먼저 새겼는데, 누군가 제일산수라는 말에 이의가 있어 호서라는 각자를 나중에 보태어 새긴 듯 합니다. 처음부터 여섯글자를 같이 새겼다면 사진 우측부터 호서제일산수라고 두자씩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자체가 다르고 글자 위치도 어긋나는 걸로 봐서 누군가 후에 부각한 것입니다.

 명월 보감폐 : 명월(글자 지워짐)(글자지워짐) 보감폐 7자 중 2자가 지워져서 마치 괄호넣기 문제 같기도 하네요밝은 달이 (         )하니, 보석거울을 닫는다.. 이런 해석이 되는데요.밝은 달이 떴으니, 달빛에 비친 호수가 맑고 밝아 굳이 경대로 얼굴을 옷매무시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같습니다.제가 괄호안을 채워본다면.."밝은 달이 (맑은 계곡에 비치니) 보석 거울을 닫는다."옛날 귀한 거울은 거울을 접었다 폈다 하는 구조였습니다.그래서 마지막 자를 닫을 폐로 읽었는데.. 한가할 한자 같기도 하네요.그런데 거울이 한가해진다는 말은 의인화된 사물이라 해도 표현이 좀 어색한 듯 합니다

 궁산을수-산태극 수태극 (山太極水太極) 지형을 상징합니다.

풍수지리에서 산줄기와 물이 어우러져 휘둥그스름하게 굽이져 태극모양(요새 표현으로 에스라인~샤방샤뱡~~)을 이루는 지세를 말합니다. 산수회포(山水回抱),산래수회(山來水回)도 같은 표현입니다.  5곡의 계곡물이 에스(S)자를 그리며 흘러내립니다. 

제6곡인 견룡대(見龍臺)

제5곡 황룡암을 출발해 한10여분 물길을 따라 오르니 작은 폭포와 어우러진 2개의 작은소(沼)가 나온다.제6곡인 견룡대(見龍臺)이다.바위글자는 6곡중 6자는선명하고 곡자는 희미하다. 견룡대 글자중 견 자만이 선명할뿐 용자는 희미하다.소 밑에서 견룡대 방향으로 올려다 보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견룡대에서 2개의 소방향으로 내려다 보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용산구곡으로 들어선 용이 승천의 채비를 완성하고 2개의 소을 왔다 갔다하는 황룡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見자는 아시다 시피 이음동자(異音同字)로 때에 따라 “견”과 “현”으로 읽습니다. 2곡이 은용담(隱龍潭)이므로 2곡을 보면서 “은”자의 상대자인 “見”자가 9곡 중에 있으리라 추정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독음은 “견룡”으로 해야 할지 “현룡”으로 해야 할지 어렵습니다. 둘다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냥 용 자체로만 보이는 용은, 드러난 용은 참 재미없습니다. 용은 2가지 빼면 시체지요… 바로 구름과 여의주… 그래서 6곡 見龍 다음인 7곡이 운용택(雲龍)인 것입니다. (스토리의 연관성이 참 대단하지요?~~) 용은 여의주 물고 구름에 쌓여 있어야 용답습니다. 이 사안은 미제로 남겨두던지, 아니면 개인 편의에 따라 견룡대나 현룡대로 읽어도 모두 맞을 것 같습니다

 

제7곡 운용택(雲龍澤)

제7곡 운용택(雲龍澤)

다시 계곡을 따라 오르는데 계곡이 갈린다. 왼편←계곡으로 올라가면 등그런 바위를 절반쯤  떼어진 모습의 바위가 있는 곳이 제7곡인-운용택(雲龍澤) 이다.바위에 새겨진 운룡택라는 글이 희미해 잘못하면 지나치기가 쉽다.운룡택 글이 새겨진 바위앞에는 좌대를 만들어 놓아 눈군가 수련을 쌓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다.신비의 구름에 쌓여 서서히 승천을 하는 용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제8곡 비룡추(飛龍)

제법 계곡폭이 좁아지고 물길도 많이 줄어든 모습이다.운룡소를 뒤로 8곡을 향해 올라가는데 7곡에서 8곡도 멀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는데 한참을 올라간다.이상하다. 이곳쯤이면 있을법도 한데 자세히 살펴보지만 바위에 새겨진 글을 확인 할 수가 없어 몇 번을 오르내림 했는지 모른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천천히 오르는데 절벽 바위가 나오고 좌,우측 전면에 글이 새겨진 바위가 있어 얼마나 반가운지 이 짧은 순간의 감격을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 같다.가까이 다가가 확인을 하니 이런!!! 신룡연 이란글이 새겨져 있다 ,8곡을 지나쳐 9곡에 오른것이다.

제9곡 신룡연(新龍淵)

다시 8곡을 향해 내려간다.5분쯤 내려오니 계곡 가운데 등그런 모습의 바위전면에 한자글이 희미한 것을 발견한다. 제8곡인 비룡추(飛龍楸)이다.올라오면서 보면 확인하기가 매우 어려워 그냥 지나친 것이다.8곡은 내려가면서 확인하는편이 훨 쉽다.계곡 물만 확인 하면서 올라오느라고 바위 자체가 비룡추라는 사실을 몰랐다.그저 감탄만 나올뿐이다.내려가면서 보니 용 자체가 하늘로 향해 오르는 모습이다.백년수도 끝에 승천하는 용을 사람들이 보고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소리치면 이내 땅에 떨어져 다시는 하늘로 못오르는 이무기가 되어 평생을 살아야하는 기구한 운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비룡추는 용산구곡으로 들어온 용의 시험대가 되는 곳이 아닐런지 용으로 승천하느냐 이무기로 남느냐 하는 기로의 시험대...............


바위자체가 단단치 않는 돌이라 한자글이 마모가 심해 잘 살펴보지 않으면 찾기가 매우 어려운 곳으로 8곡의 가로글과 비룡추의 세로글이 새겨져 있는데 매우 희미하다.

 


다시 내려온길을 따라 상신구곡의 마지막 인 신룡연(新龍淵)에 도착한다.절벽 바위밑으로 소가 형성되어 있고 절벽 바위위로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제9곡 신룡연(新龍淵), 용산구곡으로 들어온 용이 승천하고 남은 흔적의 모습이다  신비롭고 때로는 거대한몸부림으로  폭풍이 치고 비 구름몰아치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고 먹구름 사이로 햇살 이 내려 비치고 고요한 적막감이 이 신룡연의 조그마한소에 담겨진 모습이다.아~~이렇게 용산구곡(상신구곡)은 막을 내린다.

 

구룡조천(九龍朝天)-구룡(九龍)은 글자 그대로 아홉마리 용이라는 뜻보다는, 구(九)라는 숫자는 홑수의 마지막이므로 많다라는 의미입니다. 명나라 때만 해도 중국에 다녀오는 사신들의 행렬을 조천(朝天)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천은 하늘처럼 높은 황제를 알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청나라로 바뀌고 부터는 연행(燕行)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의 수도 북경을 당시에는 연경(燕京)이라고 불렀으니 그저 연경에 다녀오는 행렬이라는 뜻입니다. 은근히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얕잡아 보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구룡조천은 많은 용들이 승천해서 옥황상제를 알현한다는 의미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낼 영재들이 많이 나와서 나라와 민족이 번영하는 것을 바라는 의미로 풀이됩니다.

안전산행이 제일

올여름엔 아이들과 함께 다시 찾고싶은곳이다 계울물을 따라 거닐며 이곳은 1곡, 저 곳은 2곡 살펴보고 찾아보는 재미에 역사의 의미까지.....상신구곡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조금 벗어나면 금잔디고개로 오르는 등로와 만난다(11:20).편안한 길을 오르니 이정표가 있고 , ←왼편으로는 남매탑,→오른편으로는 바로 금잔디 고개 로 오르는 갈림길이다.금잔디 방향은 처음 가보는 길이라 또한 새롭다.금잔디 고개에 도착하니 마침 점심 시간이라 많은 인파가 북적인다(12:10).모두다 행복하고 웃음이 넘치는 모습이다.점심을 먹고 갑사구곡을 향해 내려간다.


돌길을 따라 내려가는 중에 119구조대원이 부상자를 들 것에 실고 내려간다.젊은 사람인데 발목이 심하게 다친 모습이다.안전산행이 제일이다.많은사람들이 오르고 내려간다.

간성장

벽수 윤덕영 선생이 갑사계곡의 절경을 이룬곳에 간성장을 짖고 수정봉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절승을 이룬 곳마다 큰 바위돌에 새겨 명명하였다고 전해진다.지금도 글자가 너무도 선명 할 정도로 깊게 파여있고 자획도 명필이라 할 만하다.벽수 윤덕영 선생은 순정효황후 윤비의 큰아버지로 전해진다. 

 

간옹 윤덕영(1873~1940 : 68세)-순종황제의 두 번째 정비인 순정효황후의 숙부. 치마 속에다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를 위협해서 옥새를 강탈한 후 순종에게 한일합방늑약에 옥새를 찍도록 강권했던 사람 이다. 윤덕영은 갑사 옆을 흐르는 계곡을 '구곡'이라 이름 붙이고 나서 간성장이란 별장을 지었고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말년을 흥청망청 보냈다고 한다.  현재 전통찻집 있는 곳이 바로 별장이 있었던 자리란다.

 

 

갑사9곡 수정봉(水晶峰)

신흥암에 도착하니 수정봉이 아련하게 보인다.갑사9곡중 마지막인 갑사9곡의 수정봉(水晶峰)이다.암벽을 아름답게 깍아 세워놓은 모습의 멋진 봉우리로 신흥암 천진보탑과 멋진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다.갑사구곡의 마지막 아름다움이랄까...신흥암에서 보살님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폭설로 천진보탑옆의 600여년된 적송의 가지가 부러지고 3일동안 신흥암에 갖쳐 던 일화를 듣고 8곡을 향해 내려간다.

갑사8곡 용문폭(龍門瀑)

갑사8곡은찾기가 매우싶다.용문폭포(龍門瀑)가 갑사8곡이기 때문이다.갑사계곡의 축소판이라할 수 있는 곳으로 동학사는 은선폭포, 갑사하면 용문폭이다.아름다운 용문폭포를 지나 7곡을 향해 내려간다.

갑사7곡 계명암(鷄鳴巖)

갑사 7곡은 계명암(鷄鳴巖)으로 되어 있는대 찾을길이 막막하다.대성암에서 100m근방 숲속에 있다 했는데..대성암의 처사님한데 물으니 대성암뒤쪽으로 산신각뒤에 있는 기도터 바위가 갑사7곡에 해당하는 계명암이라 한다.찾아 올라가니 그럴 듯한 바위다.아무리 둘러보아도 갑사7곡 계명암이라는 글이 보이질 않는다.갑사7곡에 대해 많은 사람들한테 질문을 해도 아는 사람이 없다.스님 말씀따라 마음의 7곡을 말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6곡을 향해 내려간다.

갑사6곡 명월담(明月潭)

갑사6곡은 연천봉과 금잔디고개의 갈림길즉,약사여래불상이 있는 옆 계곡이 제6곡 명월담(明月潭)이다.계곡폭포를 바라보면 오른편 바위에 명월담이라를 글과 작은폭포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명월담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옆에 계신 석조약사여래입니다.

 정비석의 산정무한에 나오듯 ...

" 장안사 맞은편 산에 울울창창 우거진 것은 모두 잣나무 뿐인데, 모두 이등변 삼각형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놓은 차례탑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 만으로는 미흡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을 베풀어 놓을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이 아니고 무엇이랴."

약사여래도 신도들의 공양으로는 부족해서 명월담을 곁에 두고 사시는 것일까요?

이 우문에 대한 현답은 이미 정비석님의 산정무한에서 정답을 보여주고 있네요

제5곡 군자대(君子臺)

계룡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발간한 책자에도 5곡은 군자대로 나와있습니다.그러나 이는 잘못된 표기로 금계암이 맞습니다.

일단 금계암은 다른 1~9곡의 글씨체 및 크기 등이 유사합니다.그러나 군자대는 다른 글씨와는 비교가 안되는 필체로 정말로 빼어납니다.

우암이 썼다는 전설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닌 듯합니다.(우암의 글씨는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꽤나 많습니다.

 대전근교만 해도 동춘당, 강경의 임이정, 대둔산 태고사 석문 , 부여 낙화암 등등)

"익구구곡 군자대  계룡신면 간성장"-간성장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군자대가 있었습니다.

  이 각자는 갑사구곡이 생기기 이전 부터 군자대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5곡은 군자대가 아닌 금계암이 맞는 것입니다. 

 

" 천장소회어상 아문화성우하"

 

 심오한 뜻이 있다기 보다 도교적 색채가 느껴지는 참구같습니다.

 단지 이글을 쓴 사람이 두번째 글자 "장"과 "문"을 구분해 사용한 것 보니 당시 교양적 학문의 성취는 이룬 사람같습니다.

 우리 말에도 머리라는 단어가 있고 대가리라는 단어가 있듯이. 진지가 있고 식사가 있듯이..

같은 글월이라는 뜻이지만 "장"은 글의 높임말이고 "문"은 낮추거나 평상말입니다.

두 행이 자간마다 정확히 댓구를 이루고 있어. 이런 류의 글은 한문장을 해석하면 나머지 문장도 해석이 쉬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은 입가에만 맴돌 뿐, 관념적인 의미 파악만 어렴풋 될 뿐 섣불리 해석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두번째 행의 첫글짜 "아"는 아이. 약소하다의 뜻이며 고어체입니다.

첫번째 행의 첫단어 천장(하늘의 글월, 자연의 글월, 훌륭한 글월)의 댓구이니 만큼 아문(어리석은 글월,유치한 글월)이 맞습니다.

기존에 해석하신 어진사람인발부는 부수로 읽혀질 때 어진사람인발이지, 글자로 사용될 때는 아이 아자가 맞습니다.  (재방변이나 개사슴록변의 경우에도 부수로 읽혀질 때 그리 읽지, 이 부수 자체가 글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만약 어진사람의 뜻이라면 댓구에 어울이지 않을 뿐더러, "문"이 아닌 "장"을 써야 할 것입니다.

각 다섯번째 글 "어"와 "우"는 어조사입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굳이 직역을 한다면

"훌륭한 문장은 위에서 비추며 돌고

 어리석은 글은 아래에서 이룬다." 로 해석됩니다.

갑사5곡 인의석....여려분은 군자대와 인의석 금계암 어느것이 갑사5곡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십니까?

5곡은 명월담의 계곡을 따라 밑으로 5분정도 내려오면 넓은 바위그리고 폭포 와 소가 아름다움게 조화를 이룬곳이 제5곡인 군자대(君子臺)이다.갑사구곡중 백미라 할 수 있는곳으로 넓은 바위위의 군자대 글자는  희미해져 있다.갑사5곡은 좀더 고민은 해보야 할곳이다.갑사구곡은 각자가 너무도 선명하고 정교하게 각인되어 있는데 유독 이 5곡 만이 글체가 다르다.아마 금계암 이란 글이 제 5곡이 될 수도 있는 곳이다.각설하고....

공우탑-일단 다른 글을 보면 백제시대 비류왕 4년 세웠다고 정확히 년도까지 쓰셨는데,

그 내용은 터무니 없는 듯 합니다.

그리고 정유재란 후 갑사 중창시에 은혜갚는 소 전설 관련입니다.

어미소의 생명을 구해준 인호스님의 은혜에 보답코자  새끼소가 기와를 실어오고 자재를 실어와서 갑사중창에 크게 도움을 주고 과로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설 자체로는 의미있고 감동이 있는 이야기인데, 소가 백두산과 울릉도에서 향나무를 실어왔다는 이야기는 실로 믿음직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와 유사한 전설이 제천 무암사에도 전해옵니다.

 

탑자체의 양식을 살펴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영향받아 그 후대에 건립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백제시대에 건립했다는 이야기는 도저히 맞지 않습니다.

고려시대의 양식이 보이는 탑입니다.

탑에 새겨진 글씨는 느낌상 그리 오래지 않은 세월에 새긴 것 같습니다.

내용을 봐도 다소 도교적이면서 소를 칭송하기 보다는 탑을 다시 세운 것을 칭송하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윤덕영이 간성장을 짓고 이 계곡에 눌러 살다가 스러진 옛 탑을 몇차례에 걸쳐 다시 세운 듯 합니다.

윤덕영의 경우에는 현세에서 권력, 부, 명예 등 세속적 욕망은, 실현방법은 우습지만 다 실현했기에, 현생보다 내세의 행복과 안락을 더 꿈꾸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교같은 신선사상이나 종교에 심취하거나 몰두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공우탑은 원래 중사자암에 있던 탑이라고 합니다.

사실 고려시대에 국사가 열반에 들었어도 부도를 만들었지 탑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과연 공우탑일까 하는 의문도 들지만...

전설을 배제한다면 아마도 중사자암에서 스님들의 운력을 돕던 소가 죽어 그 인연과 공로를 기려 세운탑 같습니다.

이런 내용은 전설보다 사실을 알면 더 시시해 지지요... 마치 남매탑 전설 처럼요..내가 보기엔 남매탑이 남매는 커녕 마치 남남같습니다.

그나마 당시 스님들이 소를 위해 탑을 세울 생각을 했다면 그건 상당히 진취적인 생각입니다.

 

갑사4곡 달문택(達門澤)

제4곡 달문택(達門澤)은 군자대 바로밑에 있는 연못을 말함인데  연못위 종각이 연못에 비쳐 진다.제4곡 달문택 글자표석은 고목나무 밑 바위에 새겨져 있다.달문택과 연못을 뒤로 하고 제3곡 백룡강을 찾아 내려간다.

갑사3곡 백룡강(白龍剛)

한참을 내려가니 계곡이 합쳐지는 곳에 도착하니 제2곡 이일천(二一川)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럼 제3곡 백룡강을 지나쳤단 말인가 여러번 반복하여 오르내림을 해도 찾지를 못하고 제1곡을 향해 내려간다.

 갑사2곡 이일천(二一川)

갑사제1곡 용유소(龍遊沼)

갑사제1곡 용유소(龍遊沼),갑사매표소로 내려가는곳의 용추교 밑에 자리하고 있다.삼갑동문 제1곡 용유소라 글이 선명하다.용추교 위에서 바라보는 용유소 과연 용들이 있었을 법한 곳이다.용추교를 지나 관리사무소에 들려 오창근님을 만나 제3곡 백룡강 위치와 제7곡 계명암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올라간다.

철탑상회에서 목교를 건너지 말고 계곡을 따라 오르면 수질측정 검사제2점이라는 표목이 있는곳에서 왼편 대나무 숲속에 백룡강이라는 표석이 있다.표석이 대나무 숲속에 있어 대단히 찾기가 어렵다.제3곡 백룡강(白龍剛)은 철탑상회에서 물으면 자세히안내해 준다.제3곡 백룡강이라는 글자에 압도당한다.


제7곡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대성암으로 올라 처사님을 모시고 위치를 말하니 아~~고개을 끄덕이시며 앞장을 선다.대자암 으로 가는 포장도로를 따라 고개에서 ←왼편으로 시멘트 물저수 탱크 있다 이 물 저수탱크옆 능선길을 따라 ←왼편능선을 따라 올라간다.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계룡산이야기 도인이로서 지켜야 할 몸가짐 도란,선이란,깨우침이란,잠시나마 이승을 떠나 이상의 세계에 도취된 기분이다.한참을 올라간다. 이상한 느낌이 든다. 관리소에서 말과 다르게 올라가는 느낌이다.결국은 찾지를 못하고 다시 내려오는 갈림길에서 처사님과 헤어져  물탱크가 있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20m 미터쯤 거리에서 왼편으로 용트림 해서 서있는 적송과 바위가 있어 올라가본다.조망이 매우 좋다.갑사입구가 이곳에서 전부 보이다니 나무에 가리기는 했어도 좋은 조망 바위다.지치기고 하고 잠시다리쉼을 한다. 혹시나 싶어 바위에서내려와 절벽밑으로 내려가니 아니 이곳이 갑사7곡 계명암이 아닌가 순간 아~~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찾았다. 칠곡 계명암(七曲,鷄鳴암)이란 글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기쁨 마음으로 대성암으로 내려가 스님과 처사님을 모시고 올라온다.스님과 처사님도 놀라 운 모습이다.지척에 두고 갑사구곡중 제7곡이 바로 대성암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


올여름 상신리 구곡을 지나 금잔디 고개를 넘어 갑사구곡을 내려오면서 하나하나 의미를 두고 감상 하며 내려오는 계곡,  물과 함께하는 산책 산행도 괜찮을 것 같아 짧은 코스이지만 소개합니다.


다시 내려와 관리사무소에 들려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갑사 일주문과 매표소를 지나 갑사 주차장에 도착 오후5시45분 유성행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산행일정을 마무리 한다.

역사의 심판은 냉엄합니다.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계룡산 자락의 금잔디 고개를 사이에 두고 같은 시대를 산 두인물 한사람은 애국의 길을 걸으며 고생을 했고, 또 한사람은 매국의 길을 걸으며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땅을 사는 우리들은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을 기억을 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사실을 후손들에게 역시 정확하게 물려줄 것입니다.

인생은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가을하늘님 용산구곡 산행기중에서)

위산행기는 2004년느낌표산행기에 2010년3월7일 가을 하늘님의 용산구곡 산행기 중 일부을 첨부해 재 편성한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