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리 물길따라(망국의 한)
오작실~곰티산성~곰티재~검천리~벌곡중학교~한삼천리~원불교삼동원~대목재~황령재~황령산(함박봉)~한삼천리~양산리~신양리
일자---2004년9월12일그리고 17일
갑천의 발원지를 따라 내려오다 검천리에서 오작실 지류와 합류하게 되는데 그 지류를 찾아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합니다.2004년9월12일 자전거를 타고 대전을 출발 639번도로를 따라 가수원,흑성동,벌곡면에서 68번도로를 따라 검천리 에 도착 검천교를 건너 거먹바위가든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작실 마을에 도착합니다.
우리네 최대의 명절을 맞아 벌초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습니다.오작실에서 40년이상을 살으셨다는 마을 노인분을 만나 인사를 드리고 곰티재와 곰티산성을 물으니 자세히 알려주신다.
먼저 곰티산성은, 마을로 들어서면 임도로 인해 절개지가 되어진 부분이 정면으로 보이는 뒷산으로 곰티산성보다는 성재산으로 더 알려져 있으며 곰티산성을 성재산으로 마을분들은 부르고 있었다. 다물배기에는 산성오르기전 전초기지 성곽이 있었다 하나 성곽돌이 전부 팔려나가 없어지고 지금은 논으로 변하였고,이곳을 외성, 성재산 넘어 국사봉 에는 있는 산성을 내성이라 불렀다 하나 국사봉은 가보지 못해 확인을 못했다.
곰티산성-백제의 한이 이곳에 서려있는 듯...
오작실마을 길을 따라 실버타운 건물 뒤로 인삼밭에서 왼편 시멘트 포장도로를 들어서면 <← 영주사 3km,→베티6km,↓오작실 1km>이정표가 나옵니다.베티방향으로 20여분 임도를 따라오르면 s 자로 휜 부분의 절개지 부분에서 절개지를 곧바로 오르면 성재산에 도착합니다.
정상부에 태을 두루듯 형성된 퇴뫼식 산성으로 오작실 방향으로는 토성, 금남정맥 길을 따라서는 석축으로 이어진 산성인데 철저하게 흐트러진 모습에 망국의 설움이 베어있는 듯 말없는 표시기들만이 정맥길임을 알려주고 있다.곰티산성에서 오작실을 바라보니 한눈에 들어 오는 것이 좁은 골짜기를 에워싸고 있어 쳐들어 오는 적을 요격하기에 알맞은 지형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곰티산성,백제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영토싸움이 치열하던 백제 동성왕때부터 쌓기 사작해 성왕때 완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금남정맥을 따라 신라의 주력부대는 양정고개를 넘어 연산으로, 배후 싸움에서는 황령재와 곰티재가 주 격전 지역으로 이곳을 넘으면 바로 배후가 드러나고 논산이 함락되는 것이므로 그 중요성 을 말해 주지만 곰티산성에서 스러져간 백제의 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곰티산성에서 바라본 오작실-골짜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곰티산성을 둘러보고 금남정맥을 따라 깃대봉,함박봉 방향으로 10여분 내려서면 곰티재 안부에 도착합니다.두구루의 고목 참나무와 큰 바위가 양쪽으로 양촌방향 골짜기로 서있다.
곰티재-강경의 소금을 진 지게꾼들이 이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왼편의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양촌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곰티산성은 오작실 방향으로,곰티재는 양촌방향 감시가 전술적으로 중요함을 말해 주지만 지금은 오고가는 이 없고 정맥꾼들이 달아놓은 표시기들만이 외로운 길손을 맞아 주고 있다.곰티재에서 임도길을 버리고 양촌과 오작실을 이어주던 옛길을 따라 오작실로 내려갑니다.
옛날에는,강경에 있는 소금을 금산과 저멀리 무주지방까지 지게를 지고 이곳 곰티재를 넘어 날라다 한다.한예로 장을 담그는 정월 초사흘날을 전후 해서는 소금을 진 지게꾼들이 강경에서 금산,무주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한다.
아직도 길흔적은 있으나 허리까지 차는 잡풀로 인해 한발 한발 전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얼굴을 할퀴는 풀길을 따라 20여분 내려가니 호암정사가 나온다.호암정사를 가운데 두고 3개의 정자가 자리잡고 있는데 호젓함이 마음에 든다.호암정사 뒷편의 정자는 영혼 안식처라 써있어 읽어본다.
호암정사-왼편은 곰티재길,오른쪽은 오작실 발원지 물줄기
<석간수 맑은물에 때묻은 눈과귀를 씻어내고 높다란 정자위에 조용하게 가부좌하고 앉으니 눈이 부시게 프르른 하늘까에 실비단안개 황토방 굴뚝위로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추억처럼 곱구나....................지친 내 영혼의 물레방아가 비로소 이곳 오작실에와 천년의 휴식을 얻도다.>정자 뒤로는 조그마한 샘과 탑이 있느곳으로 보아 영혼 천도 장소인 모양이다.
오작실 실버타운-물줄기는 건물 뒷편으로 흐르고
물줄기는 오작실 마을 앞으로 흐르고....
호암정사를 바라보고 왼편은 곰티재,오른쪽 골짜기는 오작실천의 발원 물줄기 이다.논밭을 지난 물줄기는 실버타운 옆을 지나 오작실 마을 앞을 지나 소금장수가 굴러떨어진 돌에 죽었다는 전설이 깃든 절벽옆을 지나 검천천과 합류를 한다.이곳에서 비 때문에 마감한다.
소금장수가 떨어지는 바위에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서린 장소..
17일 아침 06시 서부터미널에서 21번 버스를 타고 벌곡중학교 종점에 내려 백제의 한이서린 황령산(함지봉)을 찾아가 보기로 한다.벌곡중학교를 보고 내려와 물길을 따라 한삼천교 에 도착하니 물길은 호남고속도로를 왼편으로 두고 오른편으로 급격히 휘어져 내려간다.한삼천교의 구교 주변으로 모텔과 식당이 밀집에 있고 <지방2급하천 갑천-충청남도지사->표지판이 있어 드디어 대둔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2급하천으로서 당당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모텔과식당이 밀집해 있는 한삼천교-당당히 2급하천으로써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한삼천교를 지나 한덕삼거리에서 우회전 하니 한삼천리(텃골)표지석 뒤로 벼이삭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텃골(한삼천2리)마을회관앞 마을 보호수 느티나무가 6섯 아름이나 된다.마을의 고뇌와 역사를 머금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당당하다.
텃골마을표지석 뒤로 마을입구에 도착하면 한삼천2리 마을회관과 마을 보호수 느티나무가있다.
춘곡사(전주이씨 제실)옆으로 감나무가 있는 마을 공동우물은 역사의 추억으로 사라지는 것 같고 면사무소뒷길로 해서 조선시대 대학자 신독재 김집 선생의 일화가 담겨 있는 거목의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
조선 중기 예학의 대두요,성리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그리고 그의 아들 김집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아버지 김장생에 이어 동국 18현에 추앙되었다.이렇게 18현에 부자가 나란히 문묘 배향되기는 이들이 처음이자,마지막이다.
김집묘소 이정표
조선시대 예학과 유학의 거두 신독재 김집묘소(벌곡면 양산리 구고운)이정표와 논산시 시나무로 지정된 느티나무 옆으로 반공의열 전전비가 서 있다.그리고 원불교 삼동원 이정표도 보인다.
왼편은 황령재,대목리에서 발원한 물줄기-오른편은 구고운에서 발원한 물줄기
오른편의 삼동교 밑으로 황령재와 대목리,구고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합수되어 하나의 물줄기가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원동교를 지나 비포장 도로를 따라 원불교 삼동원에 도착한다.
원불교 삼동원 표지석
백두에서 발원한 지맥이 태백,소백을 지나 남으로 지리에 뭉쳐지고 한줄기 영취산에서 금남정맥을 뻗어 한가닥 운장,대둔,계룡의 준령들이 금강을 충청에 몰아가는 바 영산 지리부터 350리를 달려와 양정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400m 안팎의 연산군락이 천예의 세를 이룬 미륵불 용화 회상의 원력이 깊숙이 배인 이곳 천호산 동편자락에 이 삼동원을 세우다.
삼동원 들어가기전....
삼동원은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일원대도에 바탕하여 제2대 정산종법사가 제창한 삼동윤리{三同倫理, 동원도리[同源道理, 진리는 하나] 동기연계[同氣連契, 인류는 한 가족] 동척사업[同拓事業, 세상은 한 일터]}정신을 실천하여 모든 종교와 민족과 사상의 장벽을 트고 누구나 수도할 수 있는 도량[자연함양도량, 자연훈련도량, 자연요양도량] 건설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원불교 삼동원-왼편 주차장뒤로 등로가 잘 나있다.
삼동원을 바라보고 좌측 주차장 뒤로 등로를 따라 황령산(함지봉)을 찾아 가기로 한다.삼동원을 뒤로 15분정도 오르면 안부에 도착 우측으로 30여분 마루금을 따르면 삼각점봉에 도착하는데 황령산에서 천호산 으로 이어지는 금남정맥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고 황령재 넘어로 논산의 탑정저수지가 아련하다.삼각점봉에서 보면, 앞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로 진행하여한 한다.갈림길에서 좌측 송신탑 마루금을 따라가야 한다. 송신탑 마루금이 왼편으로는 구고운과 대목리의 발원지 물줄기를 만들며 우측으로는 수복동 발원지 물줄기를 형성하는 곳이다.
왼편산뒤로 삼동원-송전탑있는 마루금 오른편은 대목리 발원물줄기,좌측은 수복동 물줄기가 발원하는곳 삼동원은 구고운 물줄기가 발원되는 곳이다.
금남정맥 마루금과 만나는데 우측으로 진행하면 천호산인데 좌측 황령재와 황령산을 바라보고 금남정맥 마루금을 따라 진행한다.밧줄과 이정표까지 등로를 잘 정비해놓았다.대목재에는 <개태사,벌곡,사격장>이정표가 있는데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가 요란하다.
황령재, 삼천리 교육원, 639번도로가 넘어가는 고개로 백제로서는 수비에 중요한 고개 이 곳이 뚫리면 논산과 황산벌 배후가 위험하다.
대목재를 넘어 황령재에 도착한다.삼천리 교육원이 자리잡고 있는 황령재 우리말로 누리기재라고 부르는 고개로 지리적으로 협소하여 대군이라도 일시에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어 백제로서는 수비에 중요한 지역이다.
삼천리 교육원 표지석이 있는 정문으로 해서 황령산에 오른다.논산평야와 황산벌이 한눈에 들어오고 황산벌 넘어 황산성과 호각지세를 이루는 황령산, 대 신라군을 맞아 휘하5000 결사대를 이끈 계백장군은 이곳 황령산성을 무대로 한삼천리 일대와 황령산 넘어 황산벌 , 황산성에서 김유신 장군 휘하의 5만대병과 치열한 전투를 벌려 죽기를 각오한 백제군이 4번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으니 이 싸움이야 말로 백제 역사의 막을 내리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황령산에서 바라본 논산의 탑정저수지 방향
당시 역사적 대결장이었던 한삼천 주변의 세 골짜기에서 백제군과 신라군이 흘린 피와 땀이 내를 이루었다 한다.그 뒤로 후세사람들은 이골짜기를 한삼천(汗三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황령산에는 지금도 백제군이 요긴하게 사용하던 우물이 남아 있는데 황령샘 또는 황산천이라 부르고 있고 지금은 조그마한 우물이 되어 버렸다 하나 확인 해보니 우물 주변은 확실한 것 같으나 물은 없고 잡풀만이 무성하여 자세히 찾아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게 되어 있다.
황령산 우물이 있던장소ㅡ물은 없고 나무와 잡풀만이 무성하여 덧없음이....
황령산 정상은 문짝 떨어진 산불 감시초소만이 덩그렁이 놓여 있고 이곳이 역사의 현장이었던 것이라는 것도 세월의 흐름속에 흩어져 버리고 패러글라이딩 할 때 감전에 조심하라는 표지판 문구가 어쩐지 마음 허전하게 한다.
황령산 정상
삼천리 교육원에서 올라온길과 대둔산으로 향하는 금남정맥 길 가운데의 길을 따라 내려오니 삼천리 교육원 정문 바로 아래쪽으로 떨어진다.황령재 발원물줄기를 따라 내려간다.
한삼천3리 대목동 마을 표지석 뒤로 대목교가 있다.
조선시대 대학자 신독재 김집 선생의 일화가 담겨 있는 거목의 느티나무(시나무)
레미콘 공장 인덕산업개발 앞과 화성공업 논산공장앞을 통과한 물줄기는 2개의 대목교를 밑을 흘러 황룡교와 신토불이 식당뒤로 이어져 원동교에서 구고운에서 발원한 물과 합수되어 양산리 마을 표지석이 있는 제2양산교와 호남고속도로 밑을 지나 갑천과 합류한다.
아름다운 벌곡초등학교, 벌곡에 가면 벌곡초등학교에 들어가 보는 것도.....
한삼천리을 뒤로하고
한삼천과 합수되는 곳
갑천의 이름으로 유유한 물줄기는 갈대숲을 지나 양산교 밑을 통과하자 절벽 밑으로 수련종류의 노란색 외개연이 물위에 아름답게 떠있고,호남고속도를밑을 통과한 물줄기는 우측으로 크게 휘어 다시 호남고속도로 밑을 지나 신양2교밑을 지난 물줄기는 신양리 들판을 오른편으로 두고 늘어진 버드나무 사이로 평화롭게 흐른다.
양산교를 지나면 아름다운 외개연이 있는곳이다.뒤로는 호남고속도로
신양2교를 건너자 200년된 보호수 느티나무가 마을 입구에 있는데 마을나무였다가 97년도에 면나무로 승격이 되어있었다.마을 농부네들의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를 뒤로 하니 639번도로 옆으로 효자 안여택 정려가 있다.
마을나무에서 97년에 면나무로 승격이 된 보호수 느티나무
63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눕게되자 안여택은 정성을 다해 간호 했으나 갈수록 병세가 악화되었다"변이쓰면 살고,변이 달면 돌아가신다"는 말이 생각나자 매일 아버지의 변맛을 보고 병세를 알려고 했다 하니 그의 효성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이러한 병간호에도 아버지가 운명직전에 이르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니 며칠을 더 사시다가 세상을 떠났다 한다.이러인한 효행천거로 동지중추부사와 승정대부에 올라 93세에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는 승록대보 호조판서 겸 직여예의 벼슬을 추증하여 정려(旌閭)를 내렸다 한다.
효자 안여택 정려-孝에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안여택 정려각을 뒤로 639번도로를 따라 신양리(신대마을 )마을 표지석이 있는 다리를 건너 승강장에서 21번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향하는 것으로 150리 물길따라 3번째 나들이를 마감합니다.
황령산과 황령재에 대한 지도상 표기는 <함지봉,황룡재>로 되어 있고 한삼천리에 대목동 표지석 밑으로 있는 다리이름도 황룡교로 되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