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대전의3대하천

갑천150리11구간

느낌표!! 2006. 12. 25. 10:33

150리 물길따라 (갑천대교~탑립돌보)


갑천대교~탄동천~만년동~도룡동~대화동~원촌동~읍내동~전민동~탑립돌보


2004년12월4일,토요일,맑음


갑천대교를 지나 유성천과 만나 과학기술원앞 징검다리를 흐르는 갑천 건너편으로는 팔도에서 가장 살기좋다는 구성동이 자리잡고 있다.한국과학기술원,금강환경관리청,대전지방 기상청,시스템 공학연구소,국립중앙과학관이 있는 구성동,백제때 갑천들을 지키기 위해 쌓은 일명 거북성이라고 부르는 토축산성이 있는 구성동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팔도강산에서 가장살기 좋은 땅이라고 지적한 갑천들이 구성동 갑천이다.

구성동 과학기술원앞의 갑천 징검다리

성두산 안내도,산 높이 86m에 불과한 조그마한 산이지만 예사로운 산은 아니다.산 정상에는 성두산성이 있는데 적오산성의 자성으로 삼국시대 에는 중요한 지역에 위치해 있던 산성이기 때문이다.지금은 윤곽선만을 확인 할 수 있는성으로 문화재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팔도강산에서 가장살기 좋은 땅이라고 지적한 갑천들 구성동에 있는 금강환경관리청


국립중앙과학관 옆으로 흐르는 물이 탄동천이다.탄동천의 발원지 자운대 금병산으로 향한다.호국간성의 요람 자운대 뒤로 일자형으로 평풍을 펼쳐놓은듯 이어지는 산이 탄동천의 발원지 금병산이다.

자운대 고인돌,골프장 공사중에 발견 되어 두조각으로 갈라졌고 위치를 정확히 알 수 가 없다고 한다.이 금병산 자락에 선사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이다.고인돌 위에있는 성혈들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무슨 소망을 같고 이렇게 많은 세월을 허비해 가면서 갈았는지 밑바닥 우리내 민초들이 생활모습을 보는 듯하다.

자운대 고인돌(우축돌)

자운대 고인돌(좌측 돌)

자운대,일명 620사업으로 인해 마을들은 온데간데 없고 호국간성의 요람으로 변해있다.자운대의 옛지명은 추목리,신봉리,자운리 였고,일명 밤나무쟁이, 느러리,새울,줌벵이,알봉,장터,가는골,본동네,웃마장,등을 통털어 숯골이라고 했다.

탄동천의 발원지 금병산과 수운교,좌측이 종각,정문이 남문인 광덕문,뒷편 건물이 천단(도솔천)

자운대 골프장 공사로  인해 고인돌이 발견되었다.고인돌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또다른 증거로 군인 아파트 뒤로 금병산 오르는 등로를 따라 오르면 집터가 있던 자리 30여m아래 넓직한 바위위에 성혈이 있는 것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이다.

대전시 유형문화재 28호인 천단,경북궁을 지은 최원식의 마지막 작품이라고도 한다.

문살 모양 하나하나가 예술품 학모양도 모습이 전부 다르다.

숯골하면 수운교를 빼놓을 수 없을것 같다.동학 최제우를 모시는 곳으로 마을 전체가 신앙촌이었다.90퍼센트가 이북 나머지 10퍼센트가 제주도 사람으로 형성되어진 마을 이었다.수운교 천단(도설천)과 석종은 문화재로 지정되어져 있는 것으로 도솔천 건물은 하나 하나가 정교하고 섬세하게 만든 거대한 조각 예술품 이다.

하나 하나가  작품 이다.전혀 못을 쓰지 않았다 한다.

문화재자료 13호,석종 돌로 치면 부위마다 소리가 다르다,나라에 재앙이 닥치면 저절로 운다고 한다.

광덕문 위에 있는것으로 삼장법사가 인도에가 불경을 구하기 위한 행렬이라고(저팔계,손오공, 코끼리,사오정,말)그런데 나는 어처구니 형상인줄 알았다.어처구니 없게스리....

천단에서 동쪽문  용호문을 나와 장실을 거쳐 봉령각을 둘러보고 탄동천 발원지 범에골로 올라간다.집터 흔적이 있는곳에는 대나무가 큰숲을 이루고 대나무 숲속으로 사람 한길이 넘는 돌로 정교하게 쌓여진 샘이 있다.이곳이 탄동천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곳이다.발원지 샘을 확인하고 금병산 연화봉에 도착한다.

탄동천 발원지 금병산 범에골 샘

금병산 의 당나귀 바위(숯골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바위로 이곳 당나귀 바위와 쌀둑 바위가 있다)

연화봉 표지석에는 금병산 유래가 적혀있다.다시 금병산 운수봉에 도착하니 정자를 세울 자재들이 옮겨져 있다.운수봉 안부에서 금병산 약물탕 약수터에 내려갔다온다.약물탕 하면 옛날 숯골 주민들이 만병통치 약수로 애용하던 곳이다. 사시사철 바위틈에서 마르지 않고 맑게 흐르는 것을 보면 그저 신기 할 뿐이다.이 곳도 고도로 보면 제일 높기 때문에 발원지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는곳이다.

금병산 약물탕(사사사철 마르지 않고 항상 맑게 흘러 만병통치 약수물이라고 한다.)또다른 탄동천 발원지

다시 초소가 있는 노루봉에서 군인아파트 방향으로 내려가다 집터 흔적이 있는 곳에서 30m내려가면 너럭바위 위에 성혈자국이 남아있다.아주 옛날 이곳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인데 무슨 소망이 이렇게 간절했길레 바위에 둥그런 구멍이 다 생겨 났을까 우리같은 서민의 애틋한 삶에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금병산 노루봉에서 내려오는 등로에 있는 성혈,어떤 소망을 빌었길레,어떤 세상을 원했길레,이 외진 산중턱에 염원이 담긴 표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모습에 연민의 정까지 느껴진다.

군인아파트를 지나 자운대를 가로지는 물줄기는 "호국간성의 요람 자운대입니다"란 문구가 있는 호남고속도로를 통과 탄동교밑을 지나 국립중앙과학관 옆을 흘러 갑천에 흘러들어 그 생명력을 다 한다.

탄동천이란 물줄기는 금병산을 출발 자운대를 가로질러 "호국간성의 요람 자운대입니다"라는 호남고속도로을 통과 갑천으로 향해 내려간다.

탄동천과 만난 갑천은 대덕대교를 통과 kbs방송국이 있는 만년동 앞을 유유히 흐른다.만년 걱정이 없다는 만년동,갑천변 넓은 들판에 전답이 기름져서 곡식이 큰 창고에 항상 넘쳐흘렀으며 이로 인해 만년을 살아도 식량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농사골이라 하여 붙여진 만년동

둔산지구 개발사업으로 1991년에 발견된 유적,청동기시대 집 자리 3기와 신석기시대의 움집자리,용도를 알 수 없는 구덩이와 빗살무늬토기조각등 유물이 발견되었고 구석기시대의 석기 50여점도 발견 된 곳으로 대전지역에서 마을이 이루어지는 단서를 제공하였다.유적은 이전복원 후에 선사유적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둔산선사유적지

1985년 시작한 대전둔산지구택지개발로 인해 선사유적이 발견되기도 했고,강변아파트,초원,상록수 아파트등 대단위 아파트와 만년 초,중,고와 대전방송국,대전정부청사,대전시립미술관,평송청소년 수련원등 대전의 중심도시로 발전 했으니 가히 상전벽해라 아니할 수 없다.

샘머리 공원과 대전정부청사,대전천의 중심에서 갑천의 중심으로 이동되어 대전의 사회,경제,문화,행정,교통의 중심지로 이 시대 대전 역사의 중심에서 그리고 선두에서 이끌어 가는 곳이기도 하다.

만년동과 마주대하고 있는 곳이 도룡동이다.1993년 전국민의 관심을 한 곳에 모았던 대전세계박람회 가 개최되었던 곳으로 대전엑스포과학공원이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뒤쪽으로는 178m의 우성이산이 있다.

여흥민씨 세거지 도룡동 대덕초등학교 입구에 있는 "여흥민씨 삼세칠효"즉 3대에 걸쳐 7명의 효자가 배출되어 세운정문이다."민씨삼세칠효"란 여흥 민씨 중에서 18대 운촌공 민여검의 아들대로부터 3대에 걸쳐 직계6인이 세상에 돋보이는 효행을 하여 그 정신이 후인의 모범이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명문가인 여흥민씨가 정착하여 오늘날 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어 도룡동에는 지금도 여흥민씨 유적들이 많다.현재 엑스포과학공원 자리는 옛날에 보래보들이라 했고,탄동천과 갑천이 만나는 남쪽이 고깃배나 장삿배가 짐을 풀던 선창말의 포구였다 한다.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흔적도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대덕연구단지 연구원들의 생활 거주지 역할을 대신하고 있고 과학문화재단,한국표준과학연구소,대전mbc 방송국등이 자리잡고 있다.

mbc 문화방송국(뒤편은 우성이산)

승류(림)골(현 문회재청 연구소) 있는 사암 박순의 유허비,조선 선조임금때 영의정에 올라 14년간 선정을 하여 명정승으로 유명한 충주박씨의 유일한 상신이다.

이 모든 역사들을 지켜보며 갑천은 대화동 앞으로 흘러간다.갑천과 유등천이 만나는 꼭지점의 북동쪽에 자리하고 지류인 법동천이 흐르고 있어 땅이 매우 비옥해 벼가 잘 자란다는 의미로 대화라 했는데 이 대화동도 산업발전의 이름으로 대전 최초로 공업단지가 건설 되어 지금은 공장 굴뚝 연기가 온동을 뒤덮는 대화동이 되어 버렸다.

대화동 샘굿(샘고사)을 지내는 우물.마을에 부정이 생기면 그해는 샘고사를 지내지 않았다 한다.제 전날에는 샘을 푼다음 주위를 깨끗이 청소를 하고 제주는 수일 전 동네 어른들이 모여 생기복덕을 보아 운이 닿는 사람으로 정하는데,선정된 제주는 외출을 삼가고 근신하며 부부동침을 금했다 한다.

현재 유일하게 남았는 대화동 바깥구만리 마을,안구만리는 공구상가 뒤편으로 갑천 고속화 도로 매표소가 들어서 있다

대화동에서 원촌교를 건너면 대전유림의 중심지가 되는 원촌동이다.원촌동은 숭현서원 때문에 붙은 지명이 많은 곳으로 숭현서원이 있는 마을이 서원말또는 원촌이라고도 하며,지금의 원촌교가 있는곳이 예전엔 서원진 나루터였다고 한다.원촌동도 개발이 되어 sk대덕기술원,원촌정보산업학교,대전시하수종말처리장등이 자리잡고 있다.


대전 최초의 서원 이자 최초로 사액을 받은 서원인 숭현서원,수부 정광필,충암 김정,규암 송인수,사계 김장생,동춘당 송준길,우암 송시열,죽창 이시직,야은 송시영등의 8명이 배향되어 있다.

원촌교를 건너 오른편으로는 대화동,왼편으로는 읍내동 이다.계족산이 마을을 감싸고 대전천과 합류한 갑천의 물줄기가 지나면서 주변에 넓게 펴진 전답을 가지고 있던 풍요로운 고장,회덕현의 소재지로서 회덕의 사회,경제,문화,행정,교통의 중심지로 한 시대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고장이다.

원촌교를 건너 왼편 당산 배배골의 성혈,지금은 고속화 도로로 인해 조망이 없지만 예전에는 원진 나루터가 잘 보이는 곳이었다.갑천과 원진 나루터를 보며 떠나간님을 그리며 애타는 마음으로 바위를 갈았는지,아니면 전장에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갈았는지,그 소망이 여기에 담겨 있으니 어찌 애틋하지 아느랴.........

당산에서 바라본 원진나루터(원촌교)

당산 장군 바위,옛날 계족산 장군과 계룡산 장군이 싸우기 위해 이곳에서 만났는데,늦게온 계룡산 장군이 화가 나서 바위를 주먹으로 내리쳐 그 모양이 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고하며,바위에 사람 궁둥이 자국이 있는데 장군이 앉았던 자리란다.

당아래 장승,매년 음력 정월 열사흘날 저녁에 거리제를 지낸다.제 지내기 전날,유사는 장승 주변을깨끗이 청소하고 윈새끼에 한지를 달아 금줄을 친다.장승앞에 황토를 뿌리고 몸에도 황토를 개어 바른다.

회덕향교,조선시대 읍내동은 행정적 중심지였다.따라서 읍내동에는 수령의 행정청인 회덕관아는 물론,향교와 객사,사창,향사당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현존하는 회덕향교는 읍내동 옛관아터로부터 북쪽 방향으로 1리 남짓한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우술성,갑천변에 토석혼축으로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백제 부흥운동기의유민인 파가와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신라의 북서진을 방어하기위한 산성으로써 신라 문무왕당시 계족산성을 포위하고 대책을 태워 버려 수 천명을 참살하고 항복받았다.이어 신라의 상주총관 품일등이 군사를 이끌고 우술성을 공격해 와서 우술성의 부흥군 천여명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이때 달솔 조복과 함께 우설성에 남아있던 은솔 파가는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할 수 없이 신라에 항복하였다.이에 문무왕은 파가에게 급손의 관등과 전택 및 의물을 하사 하였다 한다.

읍내동 뒷골 장승,뒷골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매년 정월 열나흘날에 마을의 무사를 비는 거리제(장승제)를 지낸다.

제월당과옥오재-조선숙종때 문관을 지낸 제월당 송규림의 별당건축이다.제월당이라는 당호는 농암 김창협의 가문에 의하면 맑게 개인 저녁에 달을 제일 많이 볼수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옥오재,제월당의 아들 송상기의 호를 따서 붙인 당호,당호는 송상기의 와삼촌이었던 곡운 김수증이 지어준 것으로 사람들이 구술처럼 귀한 것은 쉽게 훼손된다 하여 질그릇의 온전함을 추구하여 훼손을 회피하려 하면 아니 된다는 뜻이다.

읍내동의 자연마을로는 뒷골,당아래,효자골,읍내로 구분되며 당아래 내에 배배골,효자골내,향교말,뒷골 내 산중골이 있어 모두 7개 마을이 되는데 지금은 도심으로 변해 마을간 구분이 어렵게 되었다.

읍내와 잿들사이에 있는 뒷골굴,잿들과 읍내 사이에 있는 경부선 철로 밑의 굴다리를 뒷골굴 이라고 하는데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복선공사로 철로를 이설 하였으나 굴다리는 그대로 남아있어 주민들은 이 굴로 통행하고 있다.

유성구와 대덕구를 가르며 흐르는 갑천은 원천교를 지나니 아파트단지가 한눈에 들어 오는 전민동에 도다른다.1970년대 대덕연구단지 조성계획이 책정되면서 연구기관이 들어서고 1993년에는 국제과학박람회(대전엑스포)가 대전에서 개최되면서 전민동을 박람회 관계자들의 숙소로 개발하여 완전히 신도시로 변하였다.

정민동 엑스포아파트단지의 정민역,전통시대의 역은 공무를 수행하는 관인의 여행을 돕고 공물을 운송하는 공공기관,정민역은 고려와 조선의 천여년 역사에서 대전지방에 설치된 유일한 역으로서 우리 고장의 교통 문화의 요람이었다.동으로는 증약역을 거쳐 경상도로 연결되고 서로는 공주 경천역을 거쳐 내포에 연결되며 남으로는 연산의 평천역을 거쳐 전라도에 이어지고 북으로는 문의의 덕유역을 거쳐 청주 서울로 이어졌으니 삼남과 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전민동에있는 마을 로 가장 대표적인 마을이 정민말로 회덕현의 정민역이 있던 자리로 지금의 전민동 엑스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이다. 정민역 표지석을 둘러보고 갑천에 도착하니 새들의 천국인 탑립돌보에 도착한다.많은 사람, 이름모를 새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천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지는해에 붉어지는 물줄기 저편으로  고속전철이 괭움을 내며 손살같이 지나가고 맞은편 계족산이 말없이 갑천을 내려다 보고 있다.이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접는다.

새들의 요람지 탑립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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