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대전의3대하천

갑천150리12구간

느낌표!! 2006. 12. 25. 11:05

150리 물길 따라 (탑립돌보~불무산)


탑립돌보~신대동~와동~신일동~송강동~문평동~금고동~불무산


2004년2월12일 일요일,맑음


읍내동은 회덕현의 소재지로 관아등 한시대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깊은 곳이라 유적이 많아 회덕 동사무소 안에 있는 불망비,선정비,유애비들과 어사 홍원모 의 영세불망비를  둘러 보고 전민동으로 향한다.

회덕 동사무소 앞 마당에 있는 각종 불망비,선정비,유허비

어사 홍원모의 영세불망비-암행어사 홍원모가 회덕 지방을 암행하다 민폐를 알고 해결해준 업적을 기려 마을 사람들이 영세토록 잊지 못한다 하여 세운 비와 비각으로 대전시 문화자료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촌교 밑으로 갑천은 여유롭게 흐르는데 옛날이곳에는  원진나루터가 있었다고... 정민동 아파트를 보니 저곳이 조선시대에는 대전에 하나뿐인 정민역이었다고 생각하니 세월의 덧없음이 느껴진다.

신대동에서 바라본 전민동 엑스포 아파트-고려와조선의천년역사중 대전에 유일한 역인 전민역이었다.

전민동, 김장생의 아들 김반의 묘역과 김익겸 충렬 정문을 둘러 보고 탑립동으로 해서 관평으로 향하는 길이 테크노벨리 대단지 공사로 갈 수 없으메 탑립돌보있는 갑천을 따라 다시 원천교를 건너 신대동으로 향한다

전민동의 김반묘역-조선인조때 충신이며 학자로서 사계 김장생의 아들로 인조반정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대 인조를 호위하여 공주까지 모셨다.왕이 공주에 있을 때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왕을 호위하여 강화도로 모셨다. 그뒤대사헌 예조참판 병조참판 이조참판등을거쳤으며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신 분이다.그외 부인의 묘2기와 큰아들 익렬,셋째아들 익겸,손자 만주의  묘가 있다.

김익겸 충렬 정문과 연산서씨 열녀정려-김반의 셋째 아들로 주전파로 유명한 사람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가서 섬을 사수하며 항전을 게속하였으나 전황이 불리해 익겸은 김상용,권수장과 함께 끝내 자분하고 말았다.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광원부원군으로 추봉되신 분이다.그의 모친 서씨부인도 강화에서 피난하던중 왕후와 세자를 모시고 있을 때 적이 강화도까지 오자 순절하신 분이다.


서포 김만중 선생 문학비-익겸의 아들로 경신대출척 때 공을 세웠으며 인경와후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서석 김만기와 <구운몽><사씨남정기>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이 있다.김만중의 <구운몽>은 소설문학의 선구로 꼽힌다.

신대동,동으로는 연축동과 와동,남쪽으로는 읍내동,서쪽으로는 갑천을 끼고 있으며 유성구 전민동과 문지동 그리고 원촌동과 접해있다.새로 터를 잡은 마을 신대동이라 했는데 고속도로와 철도로 인해 송수마루 마을 같은 곳은 아주 외진 마을로 되어 버렸다.다시 기와을 구웠던  마을이라는 와동을 거쳐 고속전철 이 지나는 갑천변을 따라 신대의 명칭을 빼앗긴 신일동에 도착한다.

신대동의 회덕역,신축공사 중이다.

신대동의 송수마루 마을- 뒤로는 경부고속도로 앞으로는 경부선 이 지나고 있어 도심속의 오지 마을이다.

와동의 수자원공사

갑천을 가르는 고속전설

예전의 신대 쓰레기 매립장 이었던 신대 저수지는 을미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옛날 들판 마을은 온데간데 없고 지금은 공업화의 선두역활를 하고 있는 대전제4산업단지로 변해있다.제4공단을 건너면 대전 제3 산업단지 목상동과문평동에 도착한다.

신일동의 장고개 유래비-옛날 이 마을 앞으로 물이 흘러서 여울이 졌는데 그 후 큰 장마로 인하여 갑천의 물이 서쪽으로 변경되어 흐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옛날에 여울이 졌던 마을이라 여울목 또는 을탄이라고 했고 그후 변경되어 을미기라 하였다 상포정과 바위베기 사이에 있는 이고개를 이용하여 신탄 시장에 다녔다 하여 장고개라 불렀다. 공업화 물결로 인하여 1995년제4공단 편입으로 이주하여 본 유래비를 세워 후세에 남기고자 합니다.

들말 두레전수관-<대전시 무형문호재제1호로 등록된 들말의 두레소리>-들말의 두레소리는 농업노동요로 한사람이 먼저 선창을 하고 뒤에 일행들이 일제히 따라 부르는 형태로 들에서 모내기나 김내기 등의 일을 할 때 부르는 노래의 기본적인 틀로 되어 있는 농요이다.

을미기 공원표지석-새일들을 적셔주던 신대저수지는 쓰레기매립장으로 변했고 그 쓰레기 매립장위에 을미기공원이 조성되었다.

신탄 제3공단 표지석-한국타이어,유한킴벌리,등 공장들이 들어서 옛모습은 찾을길이 없다.

상전벽해가된 송강동 아파트 단지

드디어 갑천의 끝자락이 보인다.다시 오던길을 되돌려 신탄과 구즉을 연결하는 신구교를 건너니 왼편으로는 탑립동과 관평들이 대덕테크노 벨리 대단지 공사로 옛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있다. 송강동에 도착하니 구즉 향토 묵 마을 이란 표지석이 반갑게 맞이한다.

묵마을 표지석-신탄과 구즉을 연결하는 신구교를 건너면 우측으로 구즉 묵마을 있다.

목신제를 지내는 느티나무와 홰싸움 놀이비-옛날 해마다 갑천변에 위치한 바구니마을에 질병이 발생하여 인명피해가 많고 가축들도 우연히 죽는 경우가 많았는가 하면 농민들은 농기구에 부상을 입어 바쁜 농사철에 일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당시 동네에 신통한 무당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백발 노인이 꿈에 나타나 선몽하기를 "너희 마을이 평안하게 할려면 마을 앞 느티나무에 제를 지내되 삼재팔날을 소명해 달라고 간절히 기원하고 제관 집에도 터를 누르고 액풀이를 하여 주면 너희 동네가 평안하리라"라는 계시를 하는 것이었다.이에 뒷바구니와 상의하여 그 해부터 액막이재가 시작되었고 그 후부터 바구니 마을은 아무사고 없이 평안히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이런한 연유로 바구니 마을 주민들은 현재의 구즉동사무소 앞에 있는 느티나무를 수호신으로 섬기며 한해의 액운이 없기를 비는 동구나무제(목신제)와 액막이놀이를 오늘까지 지속하게 되었다.

구즉 묵마을 파출소앞에 있는 바구니 홰싸움 놀이비와 보호수를 둘러보고 오봉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봉산동을 거쳐 150리 갑천 물길 마지막 다리인 불무교를 건너 금고동의불무산에 도착한다.불무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갑천과 금강이 아름답게 보인다.불무산 정상에는 금고동 산성이 있다.

150리 물길중 오봉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마지막 마을 봉산동 뒷바구니 마을

150리 물길중 마지막 다리인 불무교(금고동,대동,금탄동로도 연결 되지만 금고동 쓰레기 매립장으로 향하는 차량이 많다)

물속의 경운기-150리 갑천 줄기를 따라 내려오면서 숱한 쓰레기와 생활폐수가 갑천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면서 안타가움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무산의 금고동산성-산모양이 마치 부처가 춤을 추는 모양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불무산, 정상에는 산성있는데 갑천과 금강변에서 침공해 오는 외적을 방어 하기 위해 만든 성이다.사진은 금고동 산성 정상에 있는 돌이다.

불무산에서 바라본 금고동 쓰레기 매립장

불무산에서 바라본 금강

불무산에서 바라본 갑천과 금강-이곳에서 150리 갑천이 금강에 그 임무를 넘겨주며 끝을 맺는다

건너편으로는 문평동이 마주보이는곳 대둔산에서 발원하여 150여리를 숨가쁘게 달려온 갑천은 드디어 합수머리인 이곳에서 금강과 만나 그임무를 금강에 인계하면서 끝을 맺는다.

아쉬움을 뒤로 608번 도로를 따라 금고동 모형탑에 도착한다.- 대전시민을 위해 쓰레기 매립장 으로 고향을 내어준 금고동 주민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글이 적혀있다.

대동의 대동 초등학교 모습-지금은 폐교되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나루터 길을 따라 내려가니 이제는 국가하천 갑천이 아닌 국가하천 금강이란 표지판이다-끝이 아닌 또다른 무엇인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발걸음을 뒤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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