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성혈 여행과 이야기

인생길따라성혈여행 여덜번째나들이 (석교리고인돌성혈)

느낌표!! 2013. 10. 9. 17:18

인생길따라성혈(性穴)여행 여덜번째나들이 (석교리고인돌성혈)

 

날짜:2013년 10월 9일 수요일 맑음

코스:석교리-초정약수-대박리-박산리

 

 

 

 

 

 

 

 

 

 

삼성천 옆 석교리 마을 표지석 부터 여덜번째 발걸음 성혈 여행을 시작 한다.


 <돌다리 마을 유래>

 

석교리는 백제때는 소비포현에 속하고 고려시대에는 공주군에 속했다가 조선조 말엽에는 공주군 명탄면 지역이었다 한다. 옛날에 돌로 놓은 다리가 있었다 하여 “돌다리”라 하였는데 그 후 석교리라 하였다 한다. 뒤에는 괴화산(槐華山)이 얼싸안고 앞에는 삼성천이 금강으로 흘러가는 마을로 땅이 기름지고 살기 좋은 고장이다. 


괴화산 품자락에 아늑히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마을앞 들녁에 누런 벼가 익어가고 있는 모습이 여전 한가로운 농촌 풍경이다.


 

 

 

 

 

 

 

 

 

 

 

 

 

 

 

 

 

 

 

 

 

 

 

 

 

 

 

 

 

 

 

 

 

 

 

마을 입구 삼거리에는 돌탑이 자리 잡고 있고 돌탑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마을 분위기가 이상하다.

마을 회관은 폐쇄되어 굳게 문이 잠겨 있고 빈집들만 덩그런히 남아 있다.


 

 

 

 

 

 

 

 

 

 

 

 

 

 

 

 

 

 

 

마을은 재개발 지역으로 수용되어 주민들은 거의 마을을 떠난 상태이고 다행이 몇가구는 LH 에서 농경지를 임대해 주어 올해 까지 농사 짓는 분들이 계셨다. 고인돌 위치을 안내받고 고인돌이 자리 잡고 있는 곳에 도착 했다. <안내문>이곳은 매장문화재 보호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13조 1.2항에 따라 발굴 조사 지역 으로 관계자외 출입을 금함이라 되어 있고 기간은 2012.3.26~2013.2.5 조사기관이 특이하다 (재)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장이라 되어 있다.



 


 

 

 

 

 

 

 


 

 

 

 

 

 

 

 

 

 

 

 

이 석교리 고인돌은 석교길 32-13 앞 에 있는 것을 문화재청에서 덥개돌을 옮기고 발굴 작업을 했으나 부장품은 나온것이 없다고 한다.

 

파란 포장으로 덥어 놓은것은 괨돌 이라고 한다. 올 11월쯤 다시 재조사를 한다 고함, 3기의 고인돌중 가운데 고인돌을 제외한 2개의 고인돌 위에 성혈이 만들어져 있다.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석교리 석교길 32-13 <고인돌>



3개의 성혈이 새겨진 고인돌-매우 큰 바위를 고인돌로 사용하여 많은 인력과 자금이 투입 되었을 무덤돌 위에 3개의 성혈이 만들어져 있다.



길이가 310 cm 폭이 200 cm 나 되는 이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시간 그리고 많은 자금이 투입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권력의 힘도 작용 했으리라 것은 이 거대한 바위로 증명이 되는 것이다. 그 무덤돌 위에 새겨진 3개의 성혈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 할 뿐이다. 



또 하나의 거대한 고인돌 위에 성혈이 만들어져 있다.



이 거대한 무덤을 만든 사람들도 궁금 하지만 그 무덤돌 위에 성혈을 새겨넣은 사람들은 더욱 궁금 하다.



21 개의 성혈이 만들어져 있는데 고인돌 가장 자리 따라 만들어져 있다. 과연 무슨 사연을 담아 새겨 놓았는지 무척이나 궁금 하다. 고인돌이야 일정 기간을 두고 그 기간 내에 만들어 졌겠 지만 성혈은 시간과 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들어 졌을수도 있다. 십년을 두고 천년을 지나 면서도 사연을 담아 만들어졌을수도 있다. 그러기에 저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려 무덤을 만든 것도 위대 하지만 그 무덤 돌 위에 새겨 넣은 성혈은 어쩌면 더 위대한 존재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 겠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사연 그리고 수 세기를 넘는 세월을 담아 낸 이야기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석교리 성혈을 뒤로 초정 약수터로 발길을 잡는다.


 

석교리 뒷쪽 으로는 새로운 도로 공사중 이다. 삼성천을 따라 황룡리 방향으로 걸어 나와 황룡교 삼거리를 지나 구즉 방향 즉 대박리 방향 으로 발 걸음을 옮긴다. 들녁은 가을이 무르 익었음을 누런 들판이 말해 주고 있다. 주유소를 지나 좌측 으로 초정 약수 이정표 가 있는 곳에서 이정표 따라 좌측 도로 따라 올라 간다. 짖다 만 건물이 나오고 주차장 건너편 으로 초정 약수터 식당이 나온다. 이 식당을 사이에 두고 건너 편에 또 다른 식당이 있는데 모두 지하에서 광천수가 나온다. 원래 초정 약수터는 첫 식당앞 냇가 따라 올라 가면 우축 냇가에 샘이 있다.



 

 

 

 

 

 

 

 

 

 

 

 

 

 

 

 

 

 

 

 

<대전일보 기사 내용>

 

천연탄산이 있는 초정 약수터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이 매력적인 천연탄산 광천수

위장병 피부병에 특효,90세 이상 장수노인 많아

 

초정 약수의 명성은 자자하다. 우선 위장병에 특효라는 것이다. 이 물을 장복하면 소화가 잘 되고 변비가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한다. 또한 무좀이나 습진 등 피부병에도 효과가 있다. 이 때문에 이전부터 속병이 있거나 피부병 환자가 치료차 찾는 곳이 초정 약수다. 대개 약수에 전해 내려오는 약효에 대해선 확인 할 수 없는 옛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초정약수는 이런 사실들이 직접 목격된다는데 특징이 있다. 마을 주민들이 흔히 봐온 사실이기 때문이다. 속이 좋지 않아 이 초정 약수를 복용해 깨끗이 나았다는 사람, 몇 번 목욕으로 부스럼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부지기수다. 이런 물을 늘 마셔온 주민들은 장수를 누리고 있다. 대개가 90세 이상은 살다 간다. 물론 주민들은 원인을 물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이물로 밥을 지으면 보통 물보다 윤기가 나고 찰 진다고 한다. 백숙은 고기 맛이 연해지고 쫄깃해지는가 하면 닭 냄새도 없어진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초정약수를 무서운 물이라고 말 한다. 부정한 짓을 하고 이물을 마시면 반드시 탈이 났다고 한다. 한번은 피부병이 있는 두 사람이 머리를 감다 빗을 가지고 다투었다. 한사람이 욕설을 해댔는데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 일주일간 몸을 다스리고 다시와 제사 지내고 빌고 해서 말문이 열렸다고 한다. 원래 초정약수는 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냇가에 있었다. 7개의 구멍에서 솟아났다고 해서 일곱 탕 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부근에 관정을 박아 이리저리 끌어다 쓴다. 이물로 장사를 하는 집이 4곳으로 늘어났다. 이 마을엔 한 가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뒷산에 장군바위가 있는데 바위의 검은색이 흰색으로 변하면 동네가 잘 산다는 것, 지금은 흰색이다. 주민들은 물 뜨러오는 사람들이 음식도 팔아주고 농산물과 산채 등을 심심찮게 사가 동네에 돈이 돈다고 말한다. 옛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실감 하고 사는 이들이 초정마을 주민들이다.

 

 

 


     

     

     

     

     

     

     

     

     

     

     

     

     

     

     

     

     

     

     

     

     

     

     

     

     

     

     

     

     

     

     

     

     

     

     

     

     

     

     

     

     

     

    <대박리 마을 표지석>

    예전 초정 약수가 나오는 샘은 냇가 윗쪽에 지금도 있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지렁이 같은 이물질이 많아  식수로는 불가능 하게 되어 있고  냇가를 사이에 두고 양쪽 식당에서 지하수로 초정 약수를 뽑아 올리고 있다. 신문 기사 내용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내용이 되어 버렸다. 식당은 2군데로 줄었고 그 나마 명맥을 유지 하고 있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초정 약수터, 폐허가된 건물이 지금의 초정 약수를 말해 주는것 같다. 약수터를 되돌아 나와 608번 도로 따라 박산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박산리 마을 표지석>

     

     

    <박산리 작약 마을>

    우리 마을은 꾀꼬리봉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마을 뒷산에 이르러 아름다운 작약 꽃 봉우리 형상을 하고 있으며 뒤로는 금강이 흐르고 역사적으로는 백제시대에는 소비포현 고려시대에는 공주군 조선시대에는 공주군 명탄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기군 금남면 박산리로 속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연기군이 세종시로 편입이 되어 연기군은 옛 이야기가 되었다. 작약골을 휘돌아 보고 고래뜰로 향 한다.

     

     

     <고래뜰 마을길>

     

     

     <고래뜰 마을 표지>

    세종시 문화재 자료에는 고래뜰에 고인돌이 있다 했으나 찾아 와 보니 찾을 길이 없다. 세종에서 대전 넘어 가는 경계 좌,우측에 고인돌이 있었으나 우측 고인돌은 도로 공사중 파괴되어 없어 졌고 좌측 고인돌은 몇 년전 까지도 있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없어졌다고 한다. 경계점에 사시는 85세 되신 어르신 이야기 이다. 다른 마을분 어르신 께서도 하시는 말이 지금은 장비가 좋아 가져가기 좋지 가져 가는 사람이 고인돌 인지 문화재 인지 알기나 하겠어...어떤 사연이 담긴 바위구멍인가 벅찬 마음으로 왔건만 허망하기 짝이 없다.

     

     

    <세종~대전 경계>

    이곳에서 아쉬운 발걸음을 마무리 짓고 석교리에서 차량을 회수해 박산리 새터말 성혈을 만나러 간다. 박산리 새터말,세종과 대전의 경계 삼성천 다리가 있는 근처 밭 가장자리에 성혈 바위를 시경계 하면서 본적이 있어 찾아가 보았으나 이상하게 바위가 보이질 않는다. 마침 콩을 갈무리 하시는 밭 주인이 계시기에 물었더니 밭 농사에 필요가 없어 포크레인 으로 땅을 파고 묻어 버렸단다. 어떻게 표현 해야 될지 모르겠다. 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쉽고 안타 가운 마음이 든다.

     

    수 세기에 걸쳐 바위 구멍에 담아 내려오던 우리네 이야기가 과학이  발전하고 시대가 변하면서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다. 어쩌면 당연 한지도 모르겠다. 오늘 2곳의 성혈 바위가 없어진 것을 보면서 말이다. 다음 여행은 국곡리 성혈 이야기 입니다.

     

    감사 합니다.

     

    가는길-세종시 금남면 석교리 석교길 32-13 <새로운 주소로 바뀔 예정임>

              75번 대전버스 신탄진~대평리 석교리 입구에서 하차

              630번 세종버스 대평리~부용2리 석교리 에서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