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성혈 여행과 이야기

인생길따라성혈여행 열번째나들이 (옥천성혈)

느낌표!! 2013. 11. 26. 20:31

 

인생길따라성혈(性穴)여행 열번째나들이 (옥천성혈)

 

날짜:2013년11월26일 화요일 흐림

코스:옥천성당-향수공원-죽향리구교사-정지용생가-옥주사마소-옥천향교-육영수여사생가-옥천선사공원-안터선사공원-알봉산-지장리

시간:5시간30분


이번 성혈 여행은 소박한 아름다움이 흐르고 작아서 더욱 아름다운 향수의 고장 옥천이다. 옥천성당 성혈,오대리 고인돌 성혈, 용호리 화일 2호 선돌 성혈, 석탄리 고인돌 성혈 들이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옥천 길 따라 펼쳐지는 옛 이야기, 애절한 기도, 망자의 영생 그리고 평화와 풍년을 기원 했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그 길을 따라 여행을 떠난다.

 

 

아침8시30분 하늘빛 외벽과 파란하늘의 조화가 절묘한 역사 깊은 옥천 성당에서 성혈 여행을 시작 한다.

 

 

*옥천성당

지방에 남아있는 근대문화유산이라는 희소적 가치와 함께 한국전쟁이후 우리나라 종교건축변화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서 2002년 2월 29일 등록문화재 제 7호로 등록 관리되고 있다. 1955년 9월 8일, 현 성당건물이 신축되었는데 지붕 상랑문에 건축연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충북지역에 현재 남아 있는 1940년대에 지어진 천주교 성당 건축물중 유일하고, 해방이후 지방성당건축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

 

 

성당 사무실 앞 길에는 사각형의 돌들이 놓여져 있다. 앞에서 6번째 돌 위에 성혈이 새겨져 있다.

 

 

*옥천 성당 성혈

 

 

8개의 성혈이 새겨져 있다.

 

 

옆면은 다듬은 자국이 남아있고 윗면은 잘 다듬어져 있는 돌로서 일정한 크기로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 중요한 축대나 성벽으로 사용되었던 돌이 아닌가 생각 된다. 어느 경로로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해 사무실로 문의를 할려 했으나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도를 하고 있다.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성당 안에서 많은 기도를 하고 있다. 이곳 성혈 바위는 어떤 사연으로 이곳 성당 안 까지 옮겨 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성당과 성혈바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변해 지금은 성당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을 드리지만 아주 옛날에는 직접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흔적이 이 바위에 남아 있는 것이 안닐까. 아주 애절한 기도의 흔적으로 말이다. 어울릴것 같지 않은 옛것과 지금,그리고 성당과 성혈의 절묘한 만남을 뒤로 옥천 군청과 옥천 나들목 앞을 가로 질러 향수 공원으로 향한다. 


 

*향수 공원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문학여행의 쉼터 향수공원 경부고속도로 옥천나들목 옆, 대형 분수와 시골 정취를 담은 동산과 오솔길이 조성 되어 있다. 


 

이번 여행은 석탄리 길 따라 이어진다.


 

석탄리 길로 들어서 첫 만남은 문정리 선돌과 마을 표지석이다. 대를 이은 마을 지킴이와 알림이의 조화가 잘 어울린다. 죽향리 초등학교로 향한다.


 

*옥천죽향리사지삼층석탑

옥천읍 죽향리사지에 있었던 석탑으로 현재는 이 사지 앞에 있는 죽향 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세워져 있다. 고준한 느낌을 주는 석탑으로서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의 양식수법으로 보아 대략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죽향초등학교구교사

교정을 들어서면 꿈나무동산이 오른편에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이 동산의 끝에 구 교사가 자리하고 있다. 교정의 곁 꿈나무동산에는 정지용 시비와 육영수여사(1925~1974)의 휘호가 같은 장소에 놓여져 있다. 육영수여사도 정지용과 마찬가지로 이 학교출신의 명사로 사랑과 봉사의 화신으로 국민으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 시인 정지용과 육영수여사의 모교로도 유명한 죽향초등학교 이 건물은 현재 사용하지는 않고 있으나 그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건축양식에 있어서도 일제강점기 초등교육시설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가 커 2003년 6월 30일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 제 57호로 지정 등록되어 죽향초등학교 역사(歷史) 건물로 활용.보존되어지고 있다.

 

 

 

 

해 맑은 어린이들이 재즐대는 소리가 정겨운 시골 초등학교 에서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여사의 흔적을 만난 다니 그저 신기한 생각이 든다. 웃고 뛰놀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고 있는 어린이 들을 뒤로 하고 정지용 시인 생가로 발길을 옮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향수의 첫 구절이된 실개천 넘어로 시인의 생가가 보인다.

 

 

*정지용 생가


 

향수 <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섭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아담한 초가집 앞으로는 실개천이 지즐대며 흐르고,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공원 한켠에서는 동네아이들이 꺄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정겹다.작은 사립문을 밀고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게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가곡 향수를 흘얼 거리게 된다. 박 익고 감 익는 가을을 훌쩍 넘어선 초가의 뜰 안 감나무에 까치밥 몇 알 남겨 놓고,'배고프면 언제든지 날아와 먹고 가라' 는 인심에 보답하려는지, 까치는 가끔 반가운 손님소식 전했던 시절을 그대는 기억하는가...!!


 

멋진 신세계는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 언어 조탁의 마법사라 불리는 시인 정지용의 시 문학 세계를 해석,공공 예술로 빛은 시인의 체취를 느낄수 있는 길이다.<정지용생가-시문학 간판거리-장계관광단지 까지>


 

89년 10월 3일, ‘시인정지용흉상제막기념공연'이 있던 날. 호암아트홀에서 그 잊혀져간 고향의 옛 모습은 온 국민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이동원, 박인수의 노래 ‘향수.' 그날 정지용의 시 ‘향수'를 가사로 하여 이동원의 다정한 목소리와 멀어져간 고향을 좇는 듯, 아득한 박인수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노래 ‘향수'는 온 국민을 매료시켰다.

 

우리들의 가슴에 새겨진 고향의 정경을 오롯하게 담아낸 정지용의 시 ‘향수'는 대중위에 도도하게 군림하던 국립오페라단원 테너 박인수를 대중 속으로 끌어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이때부터 정지용의 시 향수는 더 이상 암송의 대상만이 아니라 노래로서 우리의 사랑을 더욱 받게 되었다.

 

예전에도 그랬건만 시인 정지용은 이 노래로 인하여 국민시인의 자리를 다시 한번 확고히 다지게 되었으며 그 잊혀져 가던 고향의 정경은 이 노래로 인하여 우리들 마음속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생가와 문학관에서 잠시 옛날을 떠올리면 감상에 젖다 옥주 사마소로 발길을 옮긴다.

 

 

정지용생가 뒷길 가에 사마소 이정표가 있다.


 

*옥주사마소(沃州司馬所)

옥주사마소는 한낮의 고요함 속에서 띠살문에 반쯤 드리워진 추녀의 그늘은 상념의 그늘인양 물결치며 고적함을 더하고 있었다. 돌아볼수록 운치 있는 돌담, 옛것 그대로 남아 있는 솟을대문의 문고리 하나에서도 전통건축의 표정이 서려 있는 옥주사마소 아름다운 우리 건축문화의 일면을 감상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옥천지방에 속한 사마소이다. 이 건물은 조선 효종 5년(1654)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저장해 두기 위해 국가가 설치한 창고 건물이었던 것을 고쳐서 사마소로 사용하였다. 사마소란 조선 중기 지방 생원·진사들의 협의 기구로 대개 사마시에 합격한 자가 50인 이상 되는 곳에 설치하였으며 이들의 친목도모와 정치 토론 및 교육 활동 등으로 그 고장 발전에 기여한 옥천지역의 대표적인 유림 집합소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노골적인 압력단체로 발전, 각 지방 수령의 지방 통치에 간섭하는 등의 악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옥천 향교로 향한다.

 

 

향교길에 만난 교동리 비석군 


 

*옥천향교

옥천 향교의 특이한 것은 내삼문이다. 삼문이 합쳐진 문의 형식이 아니고 세 문 모두 일정 거리를 유지하여 별개의 문으로 내었다. 대개의 경우 하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향교의 삼문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내삼문의 의미와 기능은 같다. 삼문은 가운데 문을 '정문'이라하고 양쪽 문을 협문이라 하고, 보통 때는 양쪽협문만 열어놓고 정문은 닫아둔다. 제사를 지낼 때는 세 문을 다 열어놓지만 정문은 영혼이 들어오시는 문이라 하여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고 협문만 사용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다.

 

 

지형이 협소한 상태에 맞춰 향교가 지어진 모습 같다.


 

세개의 내삼문이 눈에 들어오는 향교를 뒤로 육영수 여사 생가로 향한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 육영수 여사 생가


 

 

 

옥천 육영수 생가 <탐방안내>

관람기간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날은 휴무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료는 무료. 문의전화 043) 730-3417


 

뒤 돌아 보면 참 어렵고 힘든 세월 이었다. 책보를 둘러맨 어린 꼬마는 아침밥이 없어 굶기를 밥먹듯이 하면서 핵교에 다녔다. 그 시절을 함께 하였던 분, 한국적 아름다움과 단아한 모습, 그리고 국화꽃에 쌓인 운구 행열을 보며 온 국민이 오열 하였던 그 모습을 어찌 꿈엔들 잊힐리랴........!!!   발 길이 떨어 지질 않는다. 안타가움을 뒤로 선사 공원으로 향한다.


 

*옥천 선사 공원 옥천군 내 산재되어 있던 선사유물을 이전,복원해 놓은 공간


 

 

선돌은 자연석이나 손질한 자연석을 마을 입구에 세워 재앙을 막고, 마을의 평화와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입석, 선바위, 수구맥이, 탑, 미륵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선돌 형태에 따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특이한 줄무뉘 선돌


 

 

 

오대리 고인돌 위에 14개의 성혈이 새겨져 있다.


 

 

망자의 무덤 돌 위에 14개의 바위구멍이 새겨져 있다. 살아 생전에 남을 위해, 부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생을 보냈던 망자의 숭고한 삶 을 기억 하기 위해 만들어논 구멍이 아닐까? 그리고 망자의 영생 기원도 함께, 어떠한 희생적인 삶이 었는지 고인돌 성혈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본다.


 

 

*용호리 화일 2호 선돌 성혈, 7개의 성혈이 새겨져 있다.


 

 

많은 성혈을 보았다. 고인돌에서 자연바위에서 비석과 탑 기초석에서, 그런데 선돌에서 성혈을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모두 7개의 성혈이 새겨져 있다. 정면에 1개 뒷면에 6개, 선돌이 워낙 커서 위쪽으로 새겨진 4개의 성혈은 손이 닿지 않는다. 손이 닿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성혈이 새겨진 바위를 선돌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확인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면의 1개의 성혈은 길죽한 성혈로 이것도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다. 원을 돌리면서 성혈이 새겨지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곳은 좌우로 갈은 흔적이다.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했던 선돌위에 새겨진 7개의 성혈 어떤 기원의 흔적일까 많은 것을 상상 해본다. 알봉산 아래 아늑히 자리 잡고 있는 안터 마을로 향한다.


 

 

 

 

*<석탄리선돌> 아래쪽에는 쪼으기 수법으로 지름 90cm 의 원을 만들어, 선돌의 전체 형태와 함께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생산신, 출산신적 상징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선사 유적으로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선사 유물이다. 안터마을은 여러 형식의 고인돌과 많은 선돌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큰돌 문화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옥천 석탄리 지석묘


 

 지석묘 덥개돌 위에 1개의 성혈이 새겨져 있다.


 

선사인들이 새겨놓은 성혈. 뭔가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 터인데,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거북등 처럼 생긴 돌을 덮개석 으로 만든 것은 장수와 건강을 축원하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강변에다 돌 거북을 만듦으로써 망자의 영혼이 거북을 타고 강과 바다로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축원하지 않았을까. 망자는 석탄리를 떠나, 더 넓은 강과 바다로 나아감으로써 마침내 영생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나그네님의블로그석탄리고인돌중에서>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보는 만큼 느낄 수 있으며, 느끼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  옥천 향수 길 따라 펼쳐진 성혈 이야기, 아직은 아늠이 적어 느끼고 사랑 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나 미약 한것 같다. 바위구멍에 담고자 했던 옛 어르신들의 마음, 그 교훈을 언제나 느낄 수 있을련지, 여름이면 반딧불이가 호숫가에 불을 밝히고,겨울이면 빙어 낚시에 빠진 강태공들로 북적이는 안터 마을에서 알봉산을 오른다.

 

 

안터마을 중심길을 지나면 논옆으로 작은 선돌이 자리 잡고 있다. 석탄리 안터 3호 선돌이다. 알봉산 자락이 눈앞에 펼쳐 진다.


 

알봉산 들머리


 

알봉산(488m) 정상 


 

알봉산에서 바라본 날머리 지장리와 서대산

 

 

옥천 방향

 

 

금강줄기가 휘돌아 나가는 능선이 일명 누에 능선

 

 

지장리 길로 내려 오면 마을 버스 종점에 도착 한다.


<향수의 마지막 구절>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 거리는 곳, <지장리에서> 향수의 고장 옥천 성혈 여행을 모두 갈무리 한다.

감사 합니다.


가는길-옥천성당<경부고속도로 옥천 나들목 바로 우측 옥천군청옆이 성당이다.>-향수공원<옥천나들목 좌측>-죽향리초교<문정삼거리 이정표 석탄리 방향 바로 지나서 좌측>-정지용 생가<죽향리초교에서 생가까지 300m정도>-옥주사마소<정지용생가 뒷길 20m 근처 오른쪽 골목>-옥천향교<사마소앞길따라 400m정도>-육영수여사생가<향교옆에있음>-선사공원<석탄리길따라가면됨 육영사 생가에서 약2km 정도>-안터선사공원<선사공원에서 안터교지나 바로 있음>-알봉산<안터마을에서 정면으로 보이는산 대청호5백리길 따라 진행 성글별 안내판에서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