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대전 여행 둘레길

수운교 천단 문화유산 답사기

느낌표!! 2014. 11. 8. 12:52

 

 

문화유산 답사기

 

수운교 천단 (유형문화재 28호)

 

수운교 천단을 가기위해선 911, 606번 자운대행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신성동 승강장에서 출발한다. 신성동 두레아파트에서 자운동행 606번을 타고 버스가 좌회전 하면 성덕중학교로 예전 교명이 금성중학교였다. 그 당시 필자가 진학 할 수 있는 중학교는 두 군데였다. 금성중학교와 삼육중학교이었는데 삼육중학교는 일명 돈 있는 애들이 진학 하는 학교로 시내에 있었다.

 

당연히 금성중학교를 다녔는데 십리 길을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항상 걸어 다녔다. 그런데 삼육중학교는 시내에 있었기에 미니버스를 타고 금성중학교 앞을 지나가곤 했다. 학교 앞을 지나갈 때면 항상 책을 펴들고 의시 대는 꼴이 아니꼬워 미니버스 뒤에다 대고 팔뚝으로 말을 먹이곤 했다. 성질날 때는 발로 말을 먹이거나 돌을 집어 던지기도 했던 추억이 생각나는 중학교다. 지금 동창들을 만나 이야기 할 때 면 그 당시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다. 그때 친구들은 항상 책을 읽고 있어 공부를 무척 잘 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특별히 성공 하거나 부자가 된 사람이 없어서 지금도 그것이 항상 수수께끼다.

 

버스는 신성동 외곽을 돌아 호남고속도로 지하통로를 지나 자운대로 들어가고 있다. 좌측으로는 밤나무쟁이 우측 교육사령부 있는 곳은 예전 느러리 마을이 있던 자리다. 느러리 마을 하면 떠오르는 옛 추억이 있다. 그 당시 초등학교도 신성동에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되면 밀가루 우유와 옥수수 빵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옥수수 빵을 노란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들어 올 때면 고소한 냄새가 교실 전체에 진동하여 배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저절로 나곤 했다. 먹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눌러 참고 책보에 쌓아 어깨에 가로질러 메고는 집으로 가지고 가곤 했다. 그 이유는 집에 가면 동생들이 3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빵을 노리는 학교 선배가 있었다. 빵을 빼기지 않기 위해 먼 밤나무쟁이 마을을 돌아갔다. 하지만 외길에다 막다른 느러리 마을 입구에서 그 아까운 빵을 빼기 고는 서럽게 울며 집에 가곤 했다. 그 공포의 선배이름은 전설적으로 남아 지금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렇게 빼기면서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한입 베어 문 옥수수 빵을 책보에 메고 집으로 가져갔는데 그래도 10번 중 5번은 성공하였다.

 

또한 느러리 마을 앞에는 딴 데서는 보기 어려운 반듯반듯한 논들이 있어 둑이 잘 만들어져 있었다. 그 긴 둑을 걸어 갈 때면 여름이야 시원하여 좋았지만 겨울이면 어린 초등학생이 걸 어 갈려면 엄청난 고역을 감내해야 했다. 그것은 거칠 것 없는 들판이라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몰아쳤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었는데 오리털 잠바가 없던 40년 전 이야기니 그 어린 초등학생이 견뎌내야 했던 추위란 이루 상상 할 수 없었다. 그 둑이 유명한 느러리 동둑인데 지금 와서 보니 한발자국 거리인데 그 당시는 왜 그렇게 길었는지 모른다. 추억의 느러리 동둑은 온데 간 데 없고 멋진 보초가 인상적인 교육사령부건물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느러리 마을 앞의 줌벵이, 새울, 알봉, 장터마을 의 흔적을 쫓다 보니 어느새 수운교 입구 안내방송에 허겁지겁 배낭을 챙겨들고 내린다.

 

예약 해놓은 추목동 유적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추목동 유적은 자운대 체력단련장 일명 골프장 안에 있다 보니 사전 예약이 있어야 답사가 가능한 유적이다. 자운5교로 올라가는 길 우측으로는 탄동천이 흘러가고 왼편은 개발하지 않은 탓으로 잡풀이 우거졌는데 예전의 금봉초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신성동의 금성초등학교를 4학년 1학기 까지 다니다 분교가 되어 집에서 가까운 금봉초등학교로 등교 하던 날 왜 그렇게 신나던지 그것은 머니 머니해도 빵을 빼기지 않고 집으로 마음대로 갖고 올수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2회 졸업생으로 학교는 둔덕진 높은 곳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흔적도 찾을 수 없게끔 평평하게 정리되어 있어 그저 안타가운 마음만 들 뿐이다. 자운5교를 지나 골프장 안내소에 도착하여 예약 관계를 확인하고 아가씨가 운전하는 전기 전동카를 타고 고인돌이 있는 유적으로 향한다. 이른 아침임에도 골프 치는 여사님들이 많아 물어보니 평일 오전에는 여자분 들이 많고 주말에는 군인들이 많단다. 남자들도 많아 물어보니 군인이 아닌 일반인들 이라고 한다.

 

 

대전 추목동 유적

 

추목동 유적에 도착하여 먼저 안내 돌에 새겨진 유래부터 읽어본다. 고인돌은 2002년 체력단련장을 만들면서 발견 되었는데 깨어진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움집터 2기 돌널무덤 1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겨묻거리(부장유물)가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연대는 알기 어려우나 주위의 자운동 유적과 같은 시기인 기원전 5~6세기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고인돌의 깨어진 윗돌 에는 그 당시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구멍(性穴)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고 적고 있다.

 

추목동 유적이 발견된 지점은 방앗간이 있고 그 앞으로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계단식 논이 형성되어 있던 만선동 지역으로 가는골로 넘어가던 지점이다. 추목동 유적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내가 살던 고향이 이천 오 육백년 전에도 이렇게 호화로운 무덤을 조성 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돼서 느끼는 가슴 뿌듯함이다. 그 것은 또한 이 지역이 그 당시에도 살기 좋았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고인돌 위에는 많은 구멍이 새겨져 있는데 이렇게 많은 구멍이 새겨진 곳은 대전에서 이 추목동 고인돌이 유일한 곳이다. 130개가 넘는 구멍인데 안내 돌에는 그 당시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다 했다. 그 당시 어떠한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많은 구멍이 남아 전해지고 있을까? 성혈(性穴)여행가 이기 때문에 무척 관심이 많은데 흥에 겨운 축복의 흔적보다는 자연과 하늘이 일으키는 불행과 재앙을 막고자한 표식이 아닐까? 즉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고인돌 위에 새겨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하늘의 천재지변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영위 할 수 있게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지 아닐까 생각해 보는데 독자들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골프장의 잔디에도 어느새 가을이 다가와 초록의 색이 바라고 있다. 파란 하늘, 초록의 금병산, 드넓은 골프장을 배경삼아 자리 잡은 추목동 유적이 한 폭의 그림이다.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하지만 사진 찍기가 이제나 저제나 끝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가씨 때문에 지체하지도 못하고 아쉬운 풍경을 뒤로한다. 사무실에 도착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골프연습장 뒷길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수운교로 향한다.

 

골프연습장 앞길로 가면 솔밭입구가 나오는 반면 뒷길은 앞길과 달리 흙길이면서도 솔밭을 건너뛰고 바로 선인교 건너 수운교 장실에 도착 할 수 있다. 마침 수운교 주위로 많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환상적인 길이 형성되었다. 행운도 이런 행운이 다 있을까 지금까지 많이도 찾아 왔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환상적인 것은 처음이다.

 

 

고운 단풍이 환상적인 수운교 길

 

장실은 법회당 뒤에 따로 있는데 전체를 장실이라고 불렀다. 정식 명칭은 수운교 본부 법회당으로 법회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법회는 매주 일요일 열린다고 하여 법일 이라고 한다. 수운교의 행사는 거의 법회당에서 이루어진다. 1936년 건립된 건물로 지붕은 양철 지붕으로 되어 있고 정면10칸 측면 5칸으로 되어 있다. 수운교 현판이 걸려 있는 곳도 법회당이며 불단 바닥은 특이하게도 다다미로 만들어져 있다. 안에 들어가 보면 그 넓은 공간에 기둥이 하나도 없는데 트러스 구조로 만들어 졌기 때문 이란다. 엄숙함을 나타내기 위함인지 지형 때문이지 모르지만 7단이나 높은 단위에 세워진 법회당이 양철지붕으로 인해 가난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전체를 한눈으로 보면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 때문에 가난해도 기품이 있어 보인다. 필자에게 법회당은 어린 시절 그 자체였다. 서대문에서 구술치기 남대문에서 술래잡기 동대문에서 자치기 법회당 마당에서 딱지치기 등 구석구석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곳이다. 옛 추억이 살아있는 수운교 법회당은 등록문화재 제333호로 지정이 되었는데 필자에게는 등록문화재를 넘어 국보다.

 

 

등록문화재 제333호 수운교 법회당

 

법회당 동쪽으로는 연못이 있는데 너무나 작은데서 놀랐다. 연이 가득하고 우렁이 많았던 그 넓던 연못은 어디가고 왜 손바닥 만 하게 쪽으로 들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것을 두고 상대방은 변함이 없는데 내가 변해서 그런 건가, 차라리 보지를 말걸 그 아름답던 마음속의 연못이 순간에 깨어지고 말았다. 후회하는 마음을 안고 북쪽 대문을 들어가면 용호당이다.

 

수운교 교주 이상용 선생의 사저 였으나 1940년에 벼락으로 모두 타 버린 뒤 1948년에 현재의 건물이 다시 세워졌다. 건물 안에는 수운교 경전과 금강경탑 다라니 원판등 관련 기록물 등이 보관되어 있다. 라고 안내판에는 적고 있다. 문화재 보수 공사로 새롭게 탄생되었는데 지붕의 기와 색깔하며 처마의 물받이 등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다가온다. 시골동네 에 불어제긴 새마을 운동으로 초가를 걷어내고 울긋불긋 프라스틱 기와로 급조된 새마을 집을 연상케 한다. 모질게 비교 한 것은 그 만큼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그런 것 같다. 어린 시절 이 용호당은 근접하면 안 되는 곳으로 각인이 된 곳이다. 어른들이 “가면 안대”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용호당 근처에서 놀고나 소리 지르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마음에는 그저 좀 무서운 곳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크고 나서 보니 이해가 간다. 선생님이 계셨던 곳이기에 어른들도 조심하고 조심했던 것이 어린 마음에는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다.

 

 

등록문화재 제332호 용호당

 

용호당 옆으로는 장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수운교의 행사 음식은 모두 이곳에서 만들어 졌다.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안방에는 이상용 선생님의 사모님이 계셨던 기억이 새롭다. 무척 고왔는데 흰옷을 주로 입으셨고 낮은 음성으로 또박 또박 지시하면 모두 합장으로 답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장실의 부엌문을 나서면 맞은편으로 사랑채가 있는데 잡일을 하던 사람들이 쉬는 공간이다. 그 앞으로는 우물이 자리 잡고 있다. 두레박 우물로 신나게 놀다가 목마르면 두레질하여 그 대로 입대고 먹다 어른한테 혼나곤 했던 우물이다. 장실, 사랑채, 우물이 이루어진 삼각지점에는 향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아마 대전에서 이렇게 오래된 향나무가 있는지 모르겠다. 원 나무는 오랜 세월의 풍파로 부러져 안타깝기 그지없는데 어린 시절 보았던 향나무는 정말로 멋있었다. 둥글게 쌓아진 돌탑사이로 휘어진 향나무가 그저 신기하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조그마한 공간에 가쳐 감옥살이 하는 모습 같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법회당, 북쪽은 장실지역으로 구분이 되는데 장실 지역의 문화재 정식명칭은 수운교 용호당 등록문화재 제332호로 용호당, 장실, 우물, 우물 보호각을 일괄 지정하고 있다.

 

필자에게 장실은 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의 부모님 고향은 제주도로 제주 4.3사건을 피해 육지로 도망 나와 4촌 형이 있는 숯골로 들어오게 되었다. 숯골은 수운교를 따라 이루어진 신앙촌 마을로 대부분 이북사람들이고 일부는 제주도 사람들로 이루어 졌다. 부모님은 필자를 비롯한 사형제를 낳고 기르기 까지 목숨을 부지 하며 살아 갈수 있었던 것은 장실에서 얻을 수 있었던 식량 때문 이었다고 한다. 법회당에서 행사가 있으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장실로 일을 가셨고 저녁때 돌아오실 때면 손에는 흰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그 속에는 불공드리고 남은 흰 쌀밥이 담겨 있어 아껴먹고 아껴먹으면 삼사일은 온 가족이 굻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그러므로 법회당, 용호당, 장실, 우물, 우물보호각등의 문화재는 필자에게는 아주 각별한 문화재이다.

 

북 서문을 나가 봉령각으로 향한다. 복령각으로 향하는 길 중심에는 은행나무가 있고 왼편으론 탄동천의 작은 내가 흘러가는데 그 사이를 두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탄동천 건너를 웃마장이라 했는데 정월보름이면 대단한 기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이쪽 동네는 은행나무가 본부가 되고 상대방은 웃마장 높은 경사지가 본부가 되어 처음에는 가벼운 말싸움부터 시작한다. 먼저 목소리큰 여자 아이들을 앞세워 기세를 올린다. 그 다음으로 남자 아이들이 전면에 나서 줄을 단 깡통에 불을 붙여 빙빙 돌리다 개울건너 아이들을 향해 던진다. 그러면 상대방에선 함성과 함께 무더기의 불붙은 깡통이 나라오는데 잽싸게 흩어졌다는 다시 상대방을 향해 함성과 함께 공격한다. 그런 공방전이 벌어지다 누군가가 돌을 던지면 그 다음부터는 투석전으로 변하여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곤 했던 지역이다. 추억의 은행나무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봉령각이다.

 

 

등록문화재 제331호 봉력각

 

봉력각은 도솔천단, 법회당과 더불어 수운교의 삼단중 하나이다. 벽제는 긋기단청의 조촐한 맛을, 부연개판이나 서까래, 퇴보 등에서는 화려한 단청의 맛을 느끼게 한다. 내부 중앙에는 1937년에 만든 목조 입상의 아미타불을 주불로 봉안하였으며, 왼쪽에는 성덕군, 오른쪽에는 순덕군(수운천사 출룡자)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1946년에 건립된 등록문화재 제331호 수운교 봉력각 안내판 내용이다. 안내판 내용 중 목조 아미타불은 1937년도에 만들었는데 건물은 1946년도에 지었다고 되어 있어 근 10년 동안 아미타불은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넓은 앞을 배경으로 4대문을 만들고 담장은 높지 않게 쌓아 두른 봉령각, 뒤로는 울창한 숲이 배경이 되고 왼편으로 아름이 넘는 큰 참나무가 수호 목으로 자태를 드러내고 앞으로는 네그루의 해묵은 해송이 봉력각을 지켜보고 있다. 봉령각을 금병산 자락에 바싹 붙여 짖다 보니 앞으로는 높은 단이 형성되어 질 수밖에 없다. 높은 단으로 엄숙함이 묻어나는 건물형태가 되었는데 감나무가 있는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봉력각 전체의 자태가 한눈에 잡힌다. 바라보고 있으면 자리를 잘 잡았다.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남문에 서서 봉령각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면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확 트이는 풍경도 풍경이지만 그 가슴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경을 봉령각이 가지고 있다는 돼서 느끼는 감동이다. 아쉽게도 봉령각 건물은 지금 문화재 보수 공사 중이라 봉령각 내부의 문화재들을 볼 수 없지만 장실의 용호당과 같은 모습이 재현되지 않기를 바라며 서쪽에 자리한 우물로 향한다.

 

이 우물은 봉령각의 청수 물과 제수용으로 사용되던 우물인데 주위로 형성된 마을 사람들한테는 식수로 사용되던 우물이다. 그런데 흙으로 메워지고 잡풀로 뒤 덮여 그 정겨웠던 옛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원통의 우물에 네모 형 주위가 만들어져 있고 발 뒤 금치를 들어야 우물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양 어깨 줄에 매달린 양 철통 물지게를 지고 봉령각 앞을 지나 실개천 건너에 있는 집에 도착하여 물 항아리에 우물물을 붓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되던 곳이다. 그런데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큰 우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나란히 하는 넓이의 작은 우물로 변해 있으니 그야 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가끔은 우물 청소를 하였는데 친구 아버님이 항상 도맡아 하셨다. 이른 아침 우물 밑으로 흐르는 탄동천에는 얕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건너편 웃마장 언덕을 등 삼아 줄줄이 늘어선 초가 굴뚝에서 아침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모습들 이었다. 그 아름답던 웃마장 모습과 우물 청소 할 때면 푸짐하지는 않았지만 막걸리 한사발로 흥겹던 친구 아버님과 친구는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웃마장은 620사업으로 없어지고 친구는 한 많은 세상을 술로 달래다 젊은 나이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멈추고 잡을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해 보며 봉령각 뒤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금병산으로 오른다.

 

이 코스는 금병산을 오르는 산길 중 한곳으로 산길이 완만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 중 한곳이다. 이 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옥단봉으로 금병산 12봉 중 제5봉에 해당되는 곳이다. 금병산에는 12봉의 정상 석이 세워져 있는데 수운교에서 세운 것으로 대부분 정상에 정상 석을 세우지만 이곳은 정상에서 약간 아래 부분에 세웠다. 그것은 자연을 존중하는 의미라고 한다. 정상 석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한 곳으로 작은 산에 12개나 세워놓다 보니 "어, 이곳도 봉우리 였나?" 하고 웃음이 나오는 곳도 많아 재미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쌀독바위를 지나 개 바닥 까지 나무를 하고나서 묘가 있는 이곳에 지게를 바쳐두고 쉬던 곳이다. 쉴 때면 두 손을 머리에 괴고 하늘을 쳐다보며 감상에 젖던 곳인데 솜구름이라도 두둥실 떠 갈 때면 괜 시리 코가 시큰 해지곤 하였다.

 

옥단봉을 내려와 옥련봉을 지나 쉼 의자와 삼각점이 있는 운수봉에 도착한다. 굳이 운수봉의 금병산을 찾는 것은 수운교의 자리 앉음새를 한눈에 보고자 함이다.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광경에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들이 수운교 앞으로 펼쳐진다. 계룡산 천황봉에서 바라보는 계룡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곳의 축소판이다. 무식한 필자가 보더라도 명당이 있다면 이런 곳이 명당 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뒤로는 12폭 비단병풍이 둘러쳐져 있고 왼편으로는 적오산, 오른편으로는 수양산줄기가 내려가 마치 두 손으로 상대방을 안으려는 모습의 아름 안쪽에 수운교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광경을 보아야 수운교가 금병산에 터를 잡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삼각점이 있는 금병산 운수봉을 뒤로 하고 출세봉에서 하산 로 따라 내려가면 수운교 천단 서문에 닿는다.

 

먼저 눈에 닿는 것이 담장인데 황토 돌담으로 높은 것에 위압감이 든다. 먼저 황토를 쌓고 다음으로 막돌을 놓고 다시 황토를 쌓고 다시 막돌을 놓고 하는 식의 황토 돌담으로 처음대하면 마구잡이식 담 같지만 적당한 간격을 두고 보면 크고 작음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막돌이 균형 있게 늘어선 모습이 여간 정겹지가 않다. 드넓은 천단 둘레를 일일이 사람손이 닿아 쌓아진 담이다. 북 대문 을 거쳐 동대문으로 들어간다. 먼저 동대문에 서서 동쪽의 법회당 쪽을 바라보고 심호흡 한 뒤 뒤돌아서면 웅장한 천단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유형문화재 28호인 천단은 수운교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1929년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팔작지붕으로 다포양식이다. 라고 안내판에는 적고 있다.

 

 

유형문화재 28호 천단

 

정면에서 바라보면 천단지붕과 포근히 감싸듯 펼쳐지는 금병산 줄기와 일직선으로 이어져 천단 건물이 안정감 있어 보인다. 사시사철 푸른 솔밭의 해송이 천단 주위로 가득해 푸근함이 있다. 건물전체는 도솔천 현판을 가운데 두고 다포로 이루어진 팔작지붕이 기둥부분 보다 상대적으로 커 보여 불안정한 감이 들기도 하지만 몸체보다 큰 것을 떠받들고 있는 형태가 되어 긴장감이 돋보인다. 양쪽으로 석종을 배치하고 중앙 계단과 단 옆으로 2개의 계단을 만들었다. 건물이 올라간 단 끝은 처마 끝 일직선으로 닿게 되어 있어 한 치도 흩으러 짐이 없는 정교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높은 단으로 인해 천단의 목조건물이 안정되고 균형이 잡혀져 매우 엄숙해 보이지만 낮게 보이는 황토 돌담으로 인해 정겨워 보인다. 사실 담장은 낮은 편이 아닌데 상대적으로 천단이 높기 때문이다.

 

높은 단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바닥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데 꽃무늬를 넣고 갈고 닦아 윤을 내었다. 그 당시 대리석은 귀한 돌이고 구하기가 어려워 콘크리트바닥으로 만들었지 않나 싶다. 10개의 기초 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건물을 지었다. 특히 눈여겨 볼 점은 천단 목조건물의 아름다움이다. 삼단으로 이루어진 빗 꽃살문, 10마리의 용, 그리고 다포이다. 특히 삼단으로 이루어진 빗 꽃살문은 보면 볼수록 정교한 예술성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삼 단중 밑 부분은 도깨비를 만들었는데 무서운 도깨비가 아니라 순진한 도깨비다. 어리숙 한 모양 같기도 하지만 정감이 가는 도깨비로 표정이 하나같이 다르다. 특히 코는 아주 멋져 잘생긴 사람 코에 못지않다.

 

다음은 중앙의 빗 꽃살문으로 6각의 연꽃무늬를 사방으로 조립하여 만들었는데 상대연꽃과 연결부분은 하나의 조각으로 이어졌고 연꽃은 돋을새김으로 만들었다. 붉은색 연꽃을 비롯한 5가지의 연꽃모양으로 조화를 이루어 옅은 하늘색 조각으로 연결되어 사방으로 퍼지는 그림이다. 차분한 색깔임에도 화려한 문살로 인해 문 전체가 화려하게 보인다. 바로 위로는 용을 조각 하였는데 여의주를 갖고 희롱하는 모습을 만들어 문을 완성 하였다.

 

 

빗 꽃살 연꽃 사방무늬

 

상방은 두 마리의 학이 노니는 모습을 만들었고 창방과 평방이 두른 기둥의 끝 지점은 안에서 밖으로 머리를 내민 10마리의 용을 조각 하였다. 그 위로는 화려한 다포가 이어지는데 어마어마한 조각 맞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구름 속을 거닐 듯 한 착각의 황홀경에 빠진다. 다포위로는 겹처마가 이어지고 마지막은 팔작지붕으로 완성이 된다. 팔작지붕의 용마루와 내림마루 그리고 추녀마루의 양성은 밝은 흰색이어서 천단을 힘주어 강조한 느낌이다. 그리고 추녀마루 위에는 궁궐과 왕실 건축물 등에만 이용하던 12지신상을 배치하여 위엄을 강조하였다.

 

동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일반 절간에서 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 펼쳐진다. 물론 종교가 달라 그럴 수밖에 없지만 많은 구조물들이 배치되어 있어 공간이 무척 좁아 보인다. 양쪽으로 탑이 배치되어 있고 정면에는 우주를 상징하는 별과 해와 달 그리고 땅을 상징하는 네모의 사각 판이 배치되어 있다. 천정을 바라보면 10마리의 용꼬리가 있는데 천단 밖에서 보았던 그 10마리가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한 모습이다. 그리고 천정 중앙에는 여의주를 문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마주 보고 있다. 내부는 금탑과 탱화, 단청이 어우러져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마치 선경(仙境)의 세계를 보는 듯하다.

 

천단 서쪽에는 두드리는 부위마다 다른 소리가 나는 신기한 돌 종이 있다. 대체적으로 맑은 소리가 주로 나며 나라에 어지러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저절로 울었다는 돌 종은 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이 되었다. 돌 종을 뒤로 하고 천단의 남문에서서 천단을 바라본다. 북문의 성덕문, 동문의 용호문, 서문의 보화문, 남문의 광덕문 안에 세워진 천단의 도솔천은 모습 자체가 곧 하늘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너무나 신성한 곳이기에 어디 감히 단에 오르고 내부를 볼 수 있었단 말인가 얼씬도 하지 못했던 곳이다.

 

남문의 광덕문 오른편을 보면 등록문화재 제335호인 종각과 범종이 있다. 육모 지붕에 다포양식의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된 종각과 ,금륭산 36도솔천 범종, 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범종이 있는데 한국 전쟁당시 탄피를 녹여 주조한 것이란다. 안내판을 보면 종각은 1930년에 지어지고 범종은 1952년에 만들었다 했으니 22년의 공백이 남는 것은 원래 범종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제가 전쟁물자로 범종을 가져갔기 때문이란다.

 

 

등록문화재 제335호인 종각과 범종

 

수운교 마크의 궁을기가 그려진 넓은 광장을 내려가면 서쪽으로 수운교 본부 사무실이 있다. 1929년도에 건립된 등록문화재 제334호로 안내판 내용은 이렇다.

 

“이 건물은 수운교 교인 및 지부의 업무를 총괄 집행하는 곳이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공립학교 교실로, 광복 후에는 태극지하종교연합회 사무실로,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군 여단사령부로 사용되었다. 중앙 1칸의 한옥 지붕을 가진 현관과 상.중. 하인방이 뚜렷이 구분되는 벽면이 특징적이며, 수막새에는 ,수(水),자를 형상화 하여 조각하였고, 암막새에는 수운교를 상징하는 ,궁을도형, 무늬가 새겨져 있다.”

 

 

등록문화재 제334호 수운교 본부 사무실

 

T자 지붕 건물로 시선이 중앙으로 모아지는 효과를 가진 아담한 집이다. 담장 없이 작은 조경나무로 담을 만들고 뒤로는 해송이 가림 막을 만들어 자연스런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곳이다. 수운교의 이념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존중이다. 그래서 항상 평등을 강조 하였다. 그런 면에서 본부사무실의 계급적인 구조는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본부 사무실 앞에서 다시 북쪽을 바라보면 파란 하늘과 금병산, 천단과 종각 남문이 푸른 해송으로 둘러쳐져 마치 화폭속의 그림 같다. 그 정면에는 사람 대하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이 새겨져 있다. 등록문화재 제333호 법회당을 시작으로 용호당, 장실, 천단, 종각,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부 사무실까지 수운교 전체를 상징하는 모든 건물이 역사적 건축사적 종교적 가치가 인정 되어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 그 바탕에는 사인여천과 같이 인간종중의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 건립 하였기에 지금과 같은 문화재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수운교에서 말하는 지상천국이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 아닌가싶다. 발길은 본부 사무실을 뒤로 하고 수운교의 또 하나의 상징이 되는 솔밭으로 내려간다.

 

 

 

수운교의 또 하나의 상징인 솔밭

 

솔밭은 해송으로 이루어 졌는데 이렇게 큰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은 대전에서 이곳이 유일한 곳이지 않나 싶다. 꽉 들어찬 소나무 숲속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을 넘어 힐링 장소다. 예전 마을사람들의 행사와 놀이 장소로 이용되고 대전의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의 훈련 야영 장소로 매년 사용되던 곳이다. 잠시 쉼 의자에 누워 옛 추억을 더듬어 본다. 10리길 학교를 파하고 이곳 솔밭에 도착하면 집에 다 온 것이나 마찬 가지여서 책보를 집어던지고 친구들과 함께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 없이 놀았던 곳이다. 추억의 솔밭을 뒤로 하면 아침에 내렸던 수운교 입구 승강장이다. 이곳에서 나의 고향 숯골의 문화유산 답사를 모두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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